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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2 창백한 신앙의 관념 깨부수기 "한달쯤 쉬어야 되겠습니다. 생각도 좀 해 보고…. 저도 3학년인데, 계속 흐지부지 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이른 아침, 취재를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내가 그렇게 혼자서 끙끙거리며 '말하리라' 다짐하던 그 몇 마디를 입 밖에 꺼내놓은 것은. 편집장님께 조심스레, 이를테면 임시 휴직 청구를 부탁하려던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분명 크게 꾸지람을 듣던지, 냉소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장황한 잔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렵사리 꺼내 놓은 말을 다시 주워담아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걱정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설령 허락을 못 받더라도 '기어이 한 달을 쉬고야 말리라'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사실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뗀 나는 우습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처음의 설렘이나 긴장감은 조금씩 사라져 갔고, 교회와 신앙 생활에 대한 내 고민은 더욱 쌓여만 갔다. 밀리는 학과 리포트는 나를 더욱 짜증스럽게 했고, 기사 작성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밤새 했던 일들이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말짱 황'이 되어버리는 사실이 점점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소원해지는 친구들과 교회 식구들과의 관계, 그럴수록 더욱 멀게만 느껴지는 보이스 식구들…. 이런 것들이 처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내었을 굳은 다짐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던 길 "그래라." 참을 수 없는 두뇌의 가벼움 "저… 보이스 이십일인데요. 인터넷 기독 잡지… 더 보이스라고 하는데요." 이 말을 자연스레 입에 익히는 동안 결코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으로 한다지만 실무 경험이 없는 나에게 '기사 쓰기'는 생소하기까지 했고 '수습'이라는 호칭조차도 거북스럽고 껄끄러웠다. 그러나 나를 정말 힘들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하기,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많이 가진 척 하기,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도
잘난 척 하기, 정말 그런지 확신도 없으면서 옳은 척 하기…. 그러나 이런 짜실한 어려움들도 '기자'라는 이름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에 비하면 말 그대로 鳥足之血이었다. 없는 머리를 짜내야 하는
편집 회의 시간, 일기마저 쓸 수 없을 정도로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에도
예외 없는 기사 작성, 생명선이라는 기사 마감일(deadline)을 눈앞에 둔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기간, 한 번도 그냥 넘어간 적 없는 편집장과의
기사 다듬기. 한 달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달을 마무리해야 하는
버거움과 허망함. 나는 이런 일들 앞에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나에게
유일한 낙이라고는 틀린 글자들과 놀면서 교정을 보는 일 뿐이었다. 기사들을 모조리 Delete 당하는 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이미 그런 낭만적인 생각들은, 죽어버린 기사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은 나를 보이스의 한 사람으로 성장시켜 준 밑거름이 되었다고 자위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보다도, 보이스에서의 열 달 동안 내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내 신앙의 열심이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도망가서는 안 된다고 외쳐대는 나의 창백한 이성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진리로부터 나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가지고 있지도 않는 얄팍한 성경 지식이라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허울좋게 무장시켰다.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었다면 오죽 좋았을까마는, 내가 가진 약간의 성경 지식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은 나'로 서는 것을 방해할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완전한 무장 해제를 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발가벗기'였다. 관념적인 신앙에 대한 나의 저항과 반항은 결국 '방황'을 선택하게 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 진리 선포라는 말은 아직도 나에게는 어렵고 어색하기만 하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진리 선포라는 것은 나에게 여전히 버거운
짐일 뿐이다. 'why me?'의 물음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았던 보이스에서의 열 달 동안의 진통과 그 이후 방황의 시간들은, 나에게 비록 옥동자를 품는 기쁨을 주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가 정말 나에게 중요한 신앙과 생명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내 관념 속에만 계셨던 하나님을 내 심장 가운데 계신 하나님으로 느끼도록 해 주었다는 것. 진정한 자유함을 향하여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후지 / 광주건국교회 출석. 97년 4월부터 수습기자 훈련 시작, 같은 해 9월 정식 기자로 임명되어 활동해 온 신실한 자매이다. 98년 2월부터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있으며, 현재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2학기를 마쳤다. 당분간 전공 관련 학업에 열중할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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