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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1

 

 

 

 

 

 

  

■ 연속기획3 - 돈


돈을 무시하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돈만 있으면 못하는 게 없다. 영어학원을 다녀야 하는 데 돈이 조금만 더 있다면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는 학원을 다닐 수 있다. 컴퓨터도 펜티엄에다 16M정도는 되야 프로그램들을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시중에 OPT 바지가 날리던데 그것도 한 번 입어 봤으면 좋겠다. 땡전 한푼 없이 며칠을 보내 본 적이 있다. 일할 의욕도 나지않고 그냥 집에 일찍 들어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참 서러웠다. '내가 너무 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크리스천과 돈

성경의 인물들 중에는 부요한 이들도 많다. 야곱, 아브라함, 이삭, 욥, 솔로몬 그들은 부자였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부유한 크리스천들이 많다. 부자인 사람들은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정 그들은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축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분명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물론 그 말씀이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겠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가난한 자들을 훨씬 사랑하신 것 같다. 여기에 바로 모순이 있지 않을까?


돈, 바로 알기

돈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원래 무엇를 탐낸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돈이라는 낱말이 생긴 당시부터 돈이 부수적인 도구이고 중요한 경제수단이라는 의미보다는 그것의 세상적인 위력과 영적인 힘을 간파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돈을 끊임없이 소유하고파 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미 눈치챘던 것 같다. 또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돈'에 대해서 매우 많이 언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의 말씀을 보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unrighteous 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 이 말씀들을 자세히 보면 맘몬(mammon)이라는 낱말이 사용되였음을 알 수 있다. 맘몬의 사전적 의미는 돈, 재산 등이고 부의 신을 상징하며 어원으로 따지면 '믿는다'는 말과 관계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돈이라는 낱말을 부나 재물, 돈을 뜻하는 아랍어 낱말을 쓸 수도 있었는데 이 '맘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돈을 의인화하고 그것을 일종의 신격으로 다루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돈이 하나의 '권세'이고 그 권세는 영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 6:24말씀이 이해가 될 것이다. 사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전인격적인 신뢰를 요청하는 종교적인 믿음에 있어서 그 대상은 둘이 될 수 없다. 돈은 권세를 가졌다. 돈의 권세가 겉으로 드러나 인간이 돈을 필요로 하게 하고 스스로 재물을 얻게 하는 수단이 되려한다. 이러한 인격을 가진 돈, 즉 맘몬을 섬기는 것은 종교적인 충성을 요청한다는 암시를 가진다. 하나님이 주인인 것과 똑같이 맘몬도 주인일 수 있다. 이는 돈을 상징하는 우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인에게 있어서 돈은 거룩한 것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돈(맘몬)이냐? 하나님이냐?


돈, 바로 생각하기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 아뢰며 간구하는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필요한 부분을 다 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것을 공급해 주신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2)는 말씀처럼 이 지상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것은 하늘에 있고 이 지상의 재물은 하나님이 잠시 일정한 기간동안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레 인간의 역할이 주어진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이다. 우리 인간의 마땅한 태도는 당연히 선한 관리자로서 신실하게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관리하여야 하는것이다. 구약시대의 부는 축복의 징표였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은혜를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물질을 수단으로 하여 실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부는 더 이상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행위는 아들을 선물로 주는 행위에서 절정에 달 한 것이다. 돈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현실이며 축복인 이상 이제 부는 더 이상 징표도 아니며 축복도 아니다. 즉, 부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증표이였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증표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는 돈으로 변모되었다. 물론 돈도 제 역할을 가지고는 있으나 이전에 부가 가졌던 역할과는 다른 역할을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알아보자.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가장 우선적 수혜자를 마태복음 등의 "축복선언" 에서 말씀하셨듯이 가난한 자로 삼았다. 당시의 사회, 경제적, 종교적 상황들은 서로 맞물려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스스로 죄인으로 몰아세웠다. 그들은 '가난한 심령'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더욱 간절히 바랬으므로 예수님의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예수 자신도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업도다" (마8:20/눅9:58)

예수도 이처럼 일정한 곳에 있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난한 삶을 자처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재물에 대한 전적인 포기를 자주 가르쳤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예수를 따르도록 하였고 영생을 묻는 것은 관원에게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재산에 대한 포기의 요청와 함께 더불어 두 주인에 대한 비유처럼 부의 위험성도 거론하였다. 눅 12:13-21은 재산의 확보가 그의 생명을 확보해줄 걸로 믿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다. 이 부자처럼 사람들은 맘몬에 참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것을 믿고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안다. 여기에서 부자는 그 재물을 지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아무런 사회적 책임도 지려 하지 않은 이유로 징벌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 큰 제자들의 무리를 움직이는 데는 분명 돈을 필요로 하셨을 게다. 그 돈은 아마도 자발적인 헌신자들의 공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자들의 초청에 기꺼이 응했다. 부자 마태와 레위의 초청에도 그랬고, 나사로나 인자와 세리장 삭개의 초청에도 응하여 참석을 했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눅7:34)

예수님께서는 재산에 대한 철저한 포기를 요구했지만 구제에 대한 가르침은 어느 정도 재산을 보유할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도 있다.

돈을 바로 생각하자 해서 '돈은 악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돈을 피해서 살아야 한다' 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렇다고 돈을 우리가 생활하는데 절대 필요 한 것이므로 돈과 하나님도 별개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을 부인하려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난한 생활이, 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요청했던 것이 모든 그리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재산을 전부 팔라고 명령하신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돈에 대해서 심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에 대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고 한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돈에 대한 애착을 항상 살펴보며 회개하여야한다.


돈, 바로 쓰기

우리는 헌금을 할 때도 많은 갈등을 한 다. '오늘은 돈이 이것 밖에 없는데 은혜의 양이 적어지지는 않을까.'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헌금의 양이 아니라 헌금하는 방식이다.

돈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은혜의 세계에 살고 있다면 그것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당연한 결과이고 필연적이며 대할 수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위와 같은 거리낌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의 은혜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충성하는 청지기가 도리어 예수님께 책망 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경제생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돈을 이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볼 때, 돈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교하여 너무 불리하고 동떨어져 있으며 중요치 않아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지도 거부하지도 말아야 한다.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돈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서 살아야 하고 이 세상의 법에 따르지 않기 위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달려야 한다. 그 돈이라는 것이 대체 어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의 부는 맘몬의 부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는 사람에게 위탁된다. 느리고 그 부를 받기 전에 먼저 받을만한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데,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아무리 커다 란 그릇을 만들어도 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주 뜻을 경외함으로 형성된 그릇이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에 개입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삶을 그 속에 맡기면 우리를 궁핍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것이 우리를 돈의 억압과 그것에 대한 불행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다면 더 이상 돈 문제가 본질적인 문제로 자리잡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주기 위한 것이다. 성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봉헌 행위인 증여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증여는 무익한 것을 유용하게 만든다. 그것이 현실세계 속에서 신앙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증거다. 사람에게 증여할 때도 역시 돈은 유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랑의 행위이며 영적 행위인 것이 다.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이며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선포하는 행위다. 그러나 이 증여들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를 받거나 하나님의 주목을 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표현이고 그것이 자유와 기쁨의 행위라는 사실의 표현일 뿐이다.

현재까지 우리는 돈에 관한 논의에서 명쾌한 대답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돈에 대한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알고 생각하고, 바로 쓰는 것,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자.


글 : 조정효

 참고문헌
 - 돈, 섹스, 권력 두란노
 - 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
 - 원간 목회와 신학 <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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