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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2

 

 

 

 

 

 

  

■ 연속기획 - 상황윤리
 



대학 내의 컨닝문제는 일반화된 듯한 인상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시험이 닥칠 때마다 이곳 저곳에서 컨닝 페이퍼를 만들어댄다. 강의실의 책상과 의자에는 다양한 암기문구들이 깨알같이 박혀있다. 심지어 신학대학생들도 컨닝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다. 6월 이맘때면 캠퍼스에는 컨닝문화를 없애자는 일부 단체들의 각성의 소리가 드높아진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는 매년 비웃음이라도 당하듯이 대학생들의 컨닝현상은 여전할 뿐이다.

주일 성경공부시간이었다. 선배님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컨닝을 단 한 번도 안해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봅시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에이∼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어? 하고 떠들어댔지만 왠지 부끄러운 표정이 가득하다. 난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말이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성적에 들어가는 시험에 대해서는 결코 컨닝을 하지 않았던 나였다. 게다가 잘 생각나지 않는 문제에 대해 무지 초조해 있는 내게, 친절한(?) 아이들이 답안지를 보여준다 해도 과감히(?) 거절했었다. 다른 아이들이 컨닝을 하여 시험을 치르면 제일 비난하고 나섰던 게 나였다. 신학 대학에서까지 컨닝 행위가 잦다는 말에 무척 속이 상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컨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런 내게 선배의 질문은 일종의 자랑스러움마저 들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히 대답을 생각하던 한 아이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 아닌가?

"저기… 쪽지 시험도 해당됩니까?

난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중학교 3학년 때 고입을 준비하던 시절, 누구나 다 그렇듯이 쪽지 시험이나 모의고사를 자주 보았다. 학교 성적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야말로 연습적인 모의 시험이었으므로 감시하는 선생님도 안 계실 정도였다. 그런 판국에 누가 얌전히 주어진 문제에 끙끙대며 줄다리기를 하겠는가? 교실 전체가 몇 명의 아이들끼리 군데군데 자리를 바꿔 앉아 누구는 국어 누구는 수학 이런 식으로 과목을 맡고, 풀어서 답을 돌리는 식의 형세였다. 나 역시 그런 컨닝에 동참했다. 그 후 고등학교 때도 성적표에 들어가지 않는 쪽지 시험이나 연습적으로 풀어야 했던 시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낭들처럼 컨닝했던 기억이 있다. 말 그대로 '남들도 다 그러했기에' 난 당당했었다. 언젠가부터 내게 있어 쪽지 시험은 컨닝을 해도 무방하다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쪽지 시험은 해당되지 않겠지? 아니 해당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윽고 선배님이 되받아 질문하셨다.

"그건 시험 아니니?" 번쩍 들린 오른손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내게는 아무리 작은 도로라 하더라도 신지어 골목 가운데 놓인 차길이라도 횡단 보도가 없으면 횡단보도를 찾아 빙 돌아가는 선배가 있다. 그런 행동은 인적 없는 늦은 밤이라도 상관없다. 시간도 없는 세상에 멍청하게스리 횡단 보도를 찾는 그를 보며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전해 들었던 어린 지체들이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를 난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크리스천 젊은이 하나가 군에 입대했다. 그는 신앙이 독실했기에 스스로 평생 금주(禁酒)를 다집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고참들로부터 얄미움을 받아 마땅했다. 연이은 괴롭힘에도 그는 술을 거부했다. 어느 날 그는 심한 구타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크리스천에게 '남들도 다 그런다.' 는 전제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말처럼 자신을 튼튼하게 합리화 시켜주는 말도 없다. 컨닝을 떠나 술 마시는 행위나 무단 횡단을 하는 모습에도 떳떳해 하는 크리스천이 너무 많다. 밖에서는 죄가 아닌데 교회 안에서는 죄로 여겨지는 일들도 많다. 게다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버려질 것이 늘어난다. 자기 의 이익과 즐거움이 앞에 있는대도 '해로우니 멀리하라.' 고 권면하신다.

이런 때 순종하는 이가 얼마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100%를 두지 않고, 내 딴에는 교묘하게 내 것과 하나님의 중간 지점을 설정하여 엉성하게 행동했던 경험은 없는가?

누구나 삼국지 최고의 전략가 제갈공명을 알고 있으리라. 싸움에서는 승승장구했던 그에게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성 하나가 있었다. 그 성의 성주는 그리 용맹스럽지도 않았고 병법에 도통했던 책략가도 아니었다. 그는 매우 고지식하여 그가 알고 있는 이론 그대로만 행할 뿐이었다. 때문에 최후의 방법으로 공명이 제시한 화친정책도 오로지 적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공명은 성을 포기하고 성주는 성을 지켰다는 이야기다. 이같은 성주의 고지식함이 현실에서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희생이 많이 따를 수도 있다. 때문에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말씀을 지키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주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성경말씀도 이기주의 앞에서는 자의적으로 수정을 가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글 :
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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