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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3

 

 

 

 

 

 

  

■영화읽기

학생부군신위

어느 시골 박노인의 부음을 전화로 전해듣고, 영화감독인 큰아들 찬우와 그의 처 혜리, LA에 사는 셋째아들 찬세, 카페를 경영하는 바람끼 많은 딸 미선, 각지 각처에 흩어져 다양하게 살고 있던 일가들이 분잡스럽게 고향으로 몰려든다. 몇십 궤짝인지도 모르는 소주와 맥주 박스가 관처럼 쌓이며, 죽음처럼 적막했던 마을은 갑자기 오일장이 서는 시골 장터처럼 활기가 넘치고 잔칫집처럼 분주해진다. 돼지 멱따는 소리와 곡소리가 뒤범벅인 상가. 상을 맞은 어머니는 말이 없다. 행랑방에 사는, 씨가 불분명한 바우라는 악동은 작대기 하나를 들고 초상집을 휘젓고 다니며 아수라장을 만든다. 뒤늦게 도착한 LA에 사는 기독교신자 찬세가 독경소리가 울려 퍼지던 영전 앞에서 찬송가 <요단강건너가 만나리>를 부르기 시작한다. 한편 보험외판원을 하는 큰 고모와 작은고모는 아카디아를 몰고 나타난 배다른 오빠인 팔봉의 행세에 욕을 퍼붓다가 보험을 들어주겠다는 말과 아들을 취직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입장을 바꾸어 아부에 여념이 없다. 아버지 속만 썩여온 막내 딸 미선은 서럽게 울기만 한다. 사촌, 팔촌끼리이지만 도시에서 온 아이들과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서로 흘겨보며 틈만 나면 싸움질을 하고, 서울 아이들은 냄새나는 화장실이 싫다며 징징댄다. 읍네 로타리 다방 고마담과 미스안, 비디오 가게 주인 장달효까지 상가에 들이닥치면서 상가는 한바탕 난장판이 된다. 산 사람들에게는 장례식도 만나고 먹고 마시며 세상일을 이야기하는 삶의 연속일 뿐이고 대부분 죽음에는 무심하다. 상전야가 되어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빈상여놀이가 벌어지고 죽은 자와 산 자가 어우러진 굿판은 슬프고도 화려하게 펼쳐지는데.....

『<학생부군신위>를 통해 <301·302>와는 또 다르게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영화인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려 보았습니다. 가장 솔직하고 사실적인 화면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사실 한국의 상가란 게 그렇잖습니까. 시골 어느 상가엘 가보아도 울기만 하는 곳은 없습니다. 별난 사람, 별난 사건들이 다 모여 있게 마련이지요. 죽은 사람 덕분에 마음껏 먹을 수도 있고, 또 덕분에 평소 못하던 대성통곡도 할 수 있기에 산 사람들에게는 잔칫집과도 같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꺼리도 제공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화면에 비친 장례식은 '슬픔', '효'일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왕 떠나는 사람 좀 즐겁게 보내주자는게 조상님들의 진짜 바램이었을텐데...(중략) <학생부군신위> 촬영 개시 때에도 밝혔지만 <301·302>는 변화의 프롤로그에 불과합니다. 지금 한국 영화계를 향해 거대한 반란군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러나 <학생부군신위>는 흥행에 참패했다. <301·302>의 박철수 감독이 한창 해외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꽤 충격적인 결과이다. '임권택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축제>를 따라했다, 일본 감독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을 베꼈다'는 등의 설 때문일까? 그러나 <학생부군신위>는 인생의 허무와 장례식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을 블랙 코미디로 깔끔히 처리해 준다.

상례시에 꼭 등장하는 지방에 언급되는 '학생부군신위' 라는 문구는 "평범한 사람(=학생)의 죽음 앞"을 뜻한다. 평범한 사람의 주검 앞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실제의 상갓집에서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 중 두 가지의 용서, 집나간 딸의 기둥서방(태식)을 사위로 인정해 주고 다른 여자부터 얻은 아이(악동 바우)를 자식으로 인정해 준다. 박노인의 죽은 이상 이것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용서하지 못한 크리스천이 있다면 박노인의 죽음과 자식들의 용서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들도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자신의 옛모습을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3)"

<학생부군신위>의 마지막 장면은 인생의 허무와 삶의 헛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허무의 극복은 오직 복음 뿐이다.

또하나의 장례식 영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복음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새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글 : <부질없는소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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