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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학생부군신위>를 통해 <301·302>와는 또 다르게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영화인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려 보았습니다. 가장 솔직하고 사실적인 화면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사실 한국의 상가란 게 그렇잖습니까. 시골 어느 상가엘 가보아도 울기만 하는 곳은 없습니다. 별난 사람, 별난 사건들이 다 모여 있게 마련이지요. 죽은 사람 덕분에 마음껏 먹을 수도 있고, 또 덕분에 평소 못하던 대성통곡도 할 수 있기에 산 사람들에게는 잔칫집과도 같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꺼리도 제공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화면에 비친 장례식은 '슬픔', '효'일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왕 떠나는 사람 좀 즐겁게 보내주자는게 조상님들의 진짜 바램이었을텐데...(중략) <학생부군신위> 촬영 개시 때에도 밝혔지만 <301·302>는 변화의 프롤로그에 불과합니다. 지금 한국 영화계를 향해 거대한 반란군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러나 <학생부군신위>는 흥행에 참패했다. <301·302>의 박철수 감독이 한창 해외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꽤 충격적인 결과이다. '임권택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축제>를 따라했다, 일본 감독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을 베꼈다'는 등의 설 때문일까? 그러나 <학생부군신위>는 인생의 허무와 장례식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을 블랙 코미디로 깔끔히 처리해 준다. 상례시에 꼭 등장하는 지방에 언급되는 '학생부군신위' 라는 문구는 "평범한 사람(=학생)의 죽음 앞"을 뜻한다. 평범한 사람의 주검 앞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실제의 상갓집에서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 중 두 가지의 용서, 집나간 딸의 기둥서방(태식)을 사위로 인정해 주고 다른 여자부터 얻은 아이(악동 바우)를 자식으로 인정해 준다. 박노인의 죽은 이상 이것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용서하지 못한 크리스천이 있다면 박노인의 죽음과 자식들의 용서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들도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자신의 옛모습을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3)" <학생부군신위>의 마지막 장면은 인생의 허무와 삶의 헛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허무의 극복은 오직 복음 뿐이다. 또하나의 장례식 영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복음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새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글 : <부질없는소리>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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