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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7

 

 

 



 

 

■특별기고

예수님과 무장공비의 만남

'무장 공비의 죽음' 애도 할 것인가?

무장공비 사체지난달 20일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된 북한 잠수함 사건을 계기로 하여 촉발된 최근의 일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언론은 특종경쟁에 매시간 대간첩작전 뉴스속보를 방송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파급효과를 이리저리 자로 재는 모습으로 분주하고 주무부서인 국방부는 사건처리에 진땀을 쏟아내고 있다. 국회는 그 나름대로 이 사건을 조금은 정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부분이 역력하다. 대다수의 국민들 역시 그네들이 이러한 류의 사건이 일어나면 늘 그랬듯이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다가 사건이 발생한지 1달이 조금 넘은 지금 시들해진 느낌이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김영삼 정부는 대북정책의 기조를 강경으로 선회했다. 유엔에서는 한국이 중심이 돼서 대북한 제재조치를 마련해 북한을 한층 움츠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선 어딘지 모를 서글픔이 남아있는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한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사상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남북한 모두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동일하게 안겨주고 있는 사상 말이다.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한국전쟁은 사상자만 300만이 넘었고 1000만이 넘는 이산가족을 양산해 냈다. 이런 것들로 인해 한 민족이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민족으로 우리는 여기에 서 있다. 이제 그 전쟁이 끝난지도 반세기가 가까워오고 있다. 두세대를 거친 것이다. 그 동안에 남북한은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특히 남한은 가히 혁명이라 할 만큼 내적으로 외적으로 변했다. 이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남한 전체 인구중에 7.80%에 이른다고 하는 보고는 이러한 점을 뒷받침하는 한 대목이다. 이렇듯 많은 부분에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아니 결코 변할 것 같지 않은 것이 있다. 남쪽은 북쪽을 보고 북쪽은 남쪽을 보고 서로 믿지 못하는 것 그렇다. 이념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번 무장공비 사건을 통해서도 즉각 확인되었다. 기존의 가치와 틀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와 유행을 만들어내 기성세대로 부터 놀라움과 걱정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른바 신세대라 일컬어 지는 10대 20대 전후의 젊은 층들 조차도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기성세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 이것이 뭐 그리 이상하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념의 벽이 얼마나 높은가를 그리고 그것이 깨기에는 너무나도 두꺼운 벽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상과 크리스천의 충돌

동해의 해변 경비대플라톤은 인간에게는 4가지의 우상(偶像)이 있다고 했다. 종족, 동굴, 시장,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그는 여기서 사물의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 즉 그림자며 그것의 실상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즉 이데아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이데아의 세계에 이르려면 우상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오늘을 사는 젊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 보고 싶다. 우리에게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수 많은 상(像)이 있다. 민족으로 인해 자연히 몸에 밴 상-예컨대 유교적 습성, 불교적 색채-,그간 살아오면서 각 개인만이 경험한 수 많은 상 들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만난 경험, 시기, 방법 자체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악인중에 악인에서, 어떤 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떤 이는 친구 때문에, 누구는 누구때문에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는 이렇게 살아왔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모두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워하고 또 미워하던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자리함을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턴 우리 자신의 삶이 내 자신의 삶이 결코 아니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내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우리들 역시 이번 무장공비 사건을 대하는 데에 있어 플라톤이 말한 각각의 우상 속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듯해 씁쓸한 기분이다. 예수의 사랑이 아닌 우리가 어려서 부터 듣고 보아온 사상의 굴레가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들 안에서 가치의 판단기준으로 작용함을 보게된다. 예수는 분명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우리는 여전히 사상의 굴레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행동, 사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사랑이어야 한다. 이 사랑을 몸소 실천으로 보이신 예수는 사랑의 극점을 여러가지로 표현해 놓았다. 원수를 일곱 번에 일흔 번을 용서함으로, 내 몸과 같은 수준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는 또 자신이 우리들 개개인을 독특한 인격으로 사랑함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결코 사상이나 인종, 직업, 종교, 빈부, 노소, 남녀의 차이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한데 우리는 어떠한가? 다 그러하더라도 그리스도인 만은 아니 아직은 젊은 그래서 더 순수한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만은 이번 공비사건에 있어 좀 더 진지하고 그리스도인다울 필요가 있다. 사상보다는 사랑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목적은 그리스도 사랑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아니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예수님과 무장공비의 만남

예수는 참으로 위대하며 존경의 대상이다. 그는 배움이 남보다 뛰어나지 않았으며, 풍채가 남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좋지도 못했다. 또한 언변력이 탁월하여 그의 연설을 듣고 반했다는 성경의 기록도 없다. 그는 남들로 말하면 이제 인생에 있어 무언가를 알고 시작할 나이인 서른셋에 요절했을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아 경륜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그는 타인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조금치도 가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유한 가정환경이 허락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창녀와 거지들이 그의 친구라고 주저없이 고백할 정도로 천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으로 위대하며 존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세상의 잣대로 재면 극히 보잘것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그토록 존경받으며 신앙의 대상이 될 유일한 존재로 인정되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어주고 퍼주고 무조건 양보하고 먼저 웃고 슬픈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가난한 자의 고통을 함께 고통스러워 할 줄 아는 그 지극한 사랑 때문이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결코 미워하지 않는 사랑 말이다. 그것에 감복해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 선택되어짐으로 이제 그 분의 길에 동참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이런 말은 하고 있다. 사랑이 전부라고.

이번 무장공비 사건을 계기로 하여 무참히 죽은 양민이 3명, 군인이 7명, 공비가 22명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지음받은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똑같이 서글픔이요 아픔인 것이다. 양민의 죽음은 아픔과 서글픔이 2배요 공비의 죽음은 그 애석함의 정도가 마이너스일 수는 없음이다. 최소한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그래야 마땅하다. 결코 사상의 굴레가 그들 죽음의 가치를 재는 척도일 수는 없음이다. 문제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인 것이다.

사랑의 전달자요 화신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비사건을 통해 몇가지를 느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시대 최대의 비극인 분단 상황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해야함이다. 누가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누구에게 굴복하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은 민족의 개념에서나 국가의 개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화신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것이 가치를 재는 차선의 잣대 이상일 수는 결코 없음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은 우리시대 최대의 사역인 통일을 사랑의 기준에서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으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모두가 최고의 기도목표로서 인식해야 하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며 정열적으로 매달려야 할 사안인 것이다.

사랑과 사상두번째로는 사랑의 실천이다. 정부가 북한을 미워하고 경계해야 함이 어찌보면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또한 비기독인은 그들이 가진 그 나름의 가치관에 의해 북한을 미워하거나 혐오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러할 수 없다. 아니 그러할 자격 자체가 없다. 기도로 무장한 우리는 북한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인 사상의 굴레나 그와 비슷한 그 어떠한 것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며 어느 길을 가야 진리의 길인지를 토론하고 질책하면서 우리들의 길을, 가치판단기준을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누가 누구를 판단내리는 일은 결코 우리의 권한이 아님도 권념하자.

이제 우리는 사상의 굴레를 벗을 때가 왔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에게 이와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참으로 가치의 혼돈 속에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길인지 도통 모를 일이다. 좌가 우고 우가 좌인 세상인 것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단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재는 절대 기준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 벌써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 외의 길은 모두가 거짓이라는 점이다. 그런 예수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과연 이 시대 우리들 중에 몇이나 무장공비의 죽음을 애도할 것인가? 양민을 죽인 무장공비를 말이다. 그러난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어느 것이 진리의 길인지 말이다.

글 : 유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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