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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8

 

 

 

 

 

 

■특집

진정한 구제의 모습을 찾아...


어느덧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옷차림을 두툼하게 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 계절만 돌아오면 언제나 그랬듯이 연례행사처럼, 아니 습관처럼 하는 일이 있다. 우리 주위의 이웃을 불우(?)하다고 하여 돕는 소위 행사들이 그것이다. 이 맘때만 되면 기억나는 기사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매년 행하는 자칭 「구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어느 양로원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이웃돕기를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 기자에게 항변하기 시작했다. 그해 그 양로원에는 수많은 기업가들, 교회, 사회단체라고 밝힌 사람들이 방문하였는데, 그들의 하는 짓들이 모두 똑같더라는 것이다. 하나같이 자기들의 가식적 방문행위를 자랑이나 하려는 듯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매우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처럼 다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라면박스나 과일박스등을 가득 쌓아놓고서는 억지 웃음을 짓게 하여 또 사진을 찍더라는 것이다. 일년 내내 한번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하필이면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와서 사진을 찍자고 졸라대니 허리, 팔다리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곧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자선행위를 취재하러 나온 기자에게 그 할머니는 되레 다음과 같은 항변을 하신 것이다. "도와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폐 끼치러 왔다. 앞으로 이럴 거면 안 오는 것이 낫겠다. 우릴 그냥 내버려두라." 이 기사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는 매우 크다. 국민소득 1만불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가 비록 사회복지에서는 후진국수준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이들을 수용하는 기관들이 배를 곯지 않을 만큼의 물질을 확보하는 있다. 결국 그들이 필요한 것은 따뜻한 관심과 사랑인데 소위 조금 가졌다 하는 자들은 "주는데도 싫다고 한다"며 도리어 항변 하기도 한다. 아니면 그저 자신의 선행욕구를 해결하거나 자신의 기업의 이미지 향상 도구로써 어려운 사람들을 이용하려드는 것이다. 해마다 이와 같은 작태는 반복되고 더 심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성경에서의 구제

이러한 일에 우리 기독인은 어떠한가? 돌이켜보고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구제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구제의 어원적 의미를 살표보면 헬라어로는 '엘레모수네(eleemosune)'다. 여기에서 영어 'eleemosynary(구호, 자선)'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것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 대한 이득이 없는 기부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득이 없는'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헬라어 동사 eleeo(엘레오)는 "자비를 베풀다", "불쌍한 사람을 돕다"라는 의미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나 가난한 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 행동 자체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의 원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마태복음 6장 1절은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처럼 구제는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가 너무 자주 보인다. 보편화되었다는 표현은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말이다. 즉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구제를 하다보니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숨기기 위해 또 다른 위선을 드러내고 그러는 과정에 그릇된 모습이 자리잡게 된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이러한 외식하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와 같은 구제는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한다. 구제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투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구제는 희생적인 것이다.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구제는 참된 구제라고 보기 어렵다(물론 요즘엔 물질이 남아돌아도 나누어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참된 구제는 우리가 얼마를 가졌느냐가 관계되지 않는다. 누가복음 16장 10절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제는 내가 얼마를 가졌기 때문이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구제할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라고 해야 옳다. 자신의 아주 작은 것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이웃과 나누어 쓰면서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의 마음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 대하여 민감해야 하며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구제는 이웃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없기에 우리는 계속적이고 꾸준한 관심으로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모금을 하였다. 즉 구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필요에 응하여 행해져야 한다. 또 구제는 우리의 어떤 율법을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너그러운 마음에서 즐거이 행하여야 하며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구제의 필요성

위에서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제를 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제는 마태복음 6장 1절에 나와 있듯이 남을 도와주고 남을 위하여 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구제를 행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늘에 투자하는 것이고 우리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기 때문이다. 즉 구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호적인 것이다. 우리는 잠언 11장 25절 말씀을 기억한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케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하나님께서 구제를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풍성한 것을 주시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축복에도 순환의 원리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이웃을 돌보아야 하고 또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구제의 모습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구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구제에 대한 현재의 그릇된 모습에 대한 개선방향은 없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구제는 이웃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었다. 교회가 구제와 선교에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교인들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계셔서 특별히 배고프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외로운 자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비극 중의 비극은 교회 내에서는 예수님을 잘 믿고 열심히 살지만 세상에서는 소홀히 하여, 우리와 똑같이 사회에서 활동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구제"를 떠맡기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외로운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한다. 가난한 이에게는 물질로,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위로를 외로운자들에게는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물론 우리네 교회의 기본적인 역할인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구원을 전제로 하고 말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헌금사용을 되돌아보고 부적절한 부분은 과감히 고쳐야 한다. 특히 선교와 구제에 있어서 이 두 부분의 관심을 중대 시켜야하고 "구제"에 있어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교회재정이 일부를 구제비로 책정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교회의 증개축에 대한 관심을 구제로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또 재정적인 구제와 더불어 각 교회는 각 기관과 연계하여 자원봉사를 늘려 나가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때 성령의 은사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전도했을 뿐만 아니라 구제와 봉사에 전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초대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ㅂ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여러 모습을 기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구제함에 있어서 각 교회가 연합하고 교통하면서 어느 한 곳에 중복되게 구제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잘 알려지고 구제하기 편한(?) 곳을 찾아 구제와 봉사를 하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겠다. 가능하다면 각 교단별로 구제와 봉사 대상을 설정하여 각 교회의 형편에 맞게 이를 분산 지정하여 책임있고 지속적인 구제가 되도록 해야겠다. 세 번째로 교회가 구제를 할 때 교회의 이름으로 하기보다는 각 교단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으면 한다. 교회의 이름이 부각될 경우 교회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고 많은 구제를 하는 교회는 자연스레 외식적이 되고 자만하게 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구제하는 것은 자신의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것을 물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중 가장 커다란 것은 사랑이다. 레위기 19장 1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예수님의 가르침도 크게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들이다. 이제 창 밖에는 하얀 눈이 내릴 것이고 사람들은 이 눈을 보며 즐거워하고 낭만을 찾고 기쁨을 나눌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즐거움, 낭만, 기쁨을 함께 할 자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의를 가리고 마태복음 6장 3,4절에 기록된 것같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곤핍한 자들의 필요를 돕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올해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세상이 환히 밝아지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곧 울려퍼질 캐롤송 만큼만이라도 널리 퍼지길 기도한다.

글 : 김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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