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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6

 

 

 

 

 

 

 

성령 충만한 삶이란?

오해되고 있는 '성령 충만' ― 신유, 방언, 예언 등 은사의 올바른 개념을 밝힌다.



바울 선생님처럼 능력있는 삶을 사신 분도 자신은 열심히 선을 행하려 하나 오히려 원치 않은 악을 행할 때가 많다고 했다(롬7:19). 그래서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런 모순에 대하여 그는 선한 것이 육신 안에 거하지 않고 죄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롬 7:20). 바울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 안에 악을 행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은 신약 전편을 통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울 선생님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제시하였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자신의 노력으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은 무기력하여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기쁨과 평안, 그리고 감사를 체험하며, 마음 속에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넘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엡 5:18-20). 지금까지 능력있는 삶을 살았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잘못된 성령론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박철수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삼대 병 중의 하나로 '잘못된 성령론'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무슨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거나 병을 낫게 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비정상적으로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령과 성령 충만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성령론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박철수. 축복의 혁명. 11쪽)

성령 충만에 대한 가장 많은 오해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신비로운 은사만을 은사로 생각하고 이러한 은사를 받은 것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의 은사는 신비로운 은사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말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명백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은혜롭게 해석한다고 하면서 몇 번을 비비 꼬아서 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의 결과에 의하여 신비로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전남대학의 한 교수님은 광주 시내의 어느 교회에 시무하시는 장로님이다. 어느날 그 분이 출근 버스 안에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강사의 가르침을 받고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방언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교회를 섬기는데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결과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구원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장로님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결국 얼마 못가 그 교회를 떠나실 수밖에 없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신비로운 은사외에도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을 은사로 열거하고 있다(롬 12:8). 특히 바울 선생님은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은사를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고 고전 13장에서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하여 말함으로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비로운 은사만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은사를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다르다. 고린도 교회는 온갖 은사를 다 받은 교회였다. 그러나 바울 선생님은 고린도 교회를 어리고 육신에 속한 교회라고 했다(고전 3:1). 왜냐하면 은사는 많았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는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서이다(엡 4:12).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서로 자기의 은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며 싸우곤 하였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 교회를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한 것이다.

신비한 체험은 매우 값지고 좋은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모두 이러한 체험을 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신비 체험은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체험을 한 본인의 신앙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주변에서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이 더 큰 시험에 빠지고 잘못된 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신비 체험을 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게 되고, 체험 중심 신앙으로 전락하며, 그러한 중에 사탄이 주는 체험과 성령께서 주시는 체험을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만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은 실패하기 쉽다. 신비한 것은 초자연적인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에 필요할 때에 예외적으로 특별히 주시는 현상이다.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법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이 수시로 깨어지는 것을 결코 바라시지는 않으신다.

기독교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며, 방언의 은사는, 잘못 사용되지만 않는다면, 방언을 받은 자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 한국교회에는 이상하게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냉철한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은사는 교회에는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고전 14:4). 그래서 바울 선생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하였다(고전 14:28).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순수한 이성적인 깨달음으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4:19).

방언에도 가짜가 있다. "그 출처로 보아 방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며, 다른 하나는 사탄이 주는 방언이다. 저명한 교회의 지도자요 방언을 실제로 체험했던 잭 헤이포드 목사는 솔직이 고백하기를 '교회에서 하는 방언 가운데는 사단의 방언도 있고, 심리적인 방언도 있으며, 동시에 성령의 방언도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모든 방언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 들이기를 꺼려 하고 있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138쪽)"

실제로 소위 은사 집회라고 하는 어떤 집회에서는 방언을 연습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연습으로 습득될 수 있다는 넌센스가 21세기를 바라보는 현 시점에서도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다음의 지적을 우리는 음미해 보아야 한다. "의식있는 마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비자발적인 것은 성령께서 주신 방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힌두교, 몰몬교, 이슬람교에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경험 중에는 사단에 의한 것도 있다. 사단은 순수한 영적 체험을 모방한다.(존 스토트. 오늘 날의 성령의 사역)"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이 성숙한 후에,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것과 사탄이 주는 것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을 때 방언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올무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박사들과 대학 교수들이 말도 되지 않는 이단의 가르침에 빠져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 중에, 많은 교인들이 목사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멘 아멘하다가 심지어는 목사가 기침만 하여도 아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소 과장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해서 무조건 아멘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지를 판단하여야 한다.

예언의 은사는 많이 오해하고 있는 은사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들이다. 개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고 말해 주는 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성령 충만하였다고 하는 자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빙자한 점쟁이들이 공공연히 활동을 하고 있다. 무슨 사업을 해야 성공하겠느냐, 내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겠느냐 같은 것은 부채신(?)과 같은 잡신에게나 물어야지 거룩하신 하나님께 물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예언'이라고 번역된 이 말의 헬라 원어를 바로 번역하자면 '대신 말하는 것' 즉 '대언'이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65-66쪽)" 예언이란 "길이 없는 시대에 길을 찾아서 선포하는 것이다. 나라와 백성과 그 시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정치에 길이 없고 남북 통일에 길이 없고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뚫고 나갈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길을 선포해 주는 것, 그것이 예언이다.(김진홍. 비전있는 교회. 38-39쪽)"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살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신유는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오직 안수 기도를 하는 것으로만 병을 고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는 질병들이 많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신유의 은사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필요한 시대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오지나 덜 개화된 사회에서는 신유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문명사회에 살면서 의술을 사용하지 않고 신유의 은사만을 바라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의술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병든 자를 위하여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였다(약5:14). 여기에서 기름이란 옛날에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열심히 공부하여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또 열심히 공부하여 자격을 갖춘 의사가 되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신유의 은사를 받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시는 신유의 은사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초자연적인 체험이나 기적을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한 신앙이 아니다. 성경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전에 설교시간에 어떤 목사님이 쓰신 책에 나온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피곤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권면이 지혜로운 권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이 피곤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쉬라는 메시지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쉬어야 한다." 그랬더니 이 말에 반발하는 교우가 있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바에 의하면 철야기도회 때 피곤하여 더 열심히 기도하였더니 피곤이 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와 같은 특별한 현상을 일반화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살려주시라고 온 힘을 다해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살려 주실 수 있다. 21세기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얼마든지 그러한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당연히 살려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서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4:7)"고 하신다.

"성경이 보여주는 기적은 우연적인 사건, 하나님이 갑자기 무엇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구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인생들에게 계시해 주시는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45쪽)" 초자연적인 체험이나 기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이적을 통하여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꾸짖으셨다(마 12:39).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것을 감격으로 간직하여야지 자랑하고 다니는 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한다. 바울 선생님은 삼층천에 올라갔다 온 감격에 대하여 15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이 간직하였다. 신비 체험은 자신의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만 회중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비 체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허욕을 가질 때에 마귀가 뛰어들기 쉽기 때문이다. 즉 마귀가 천사로 가장하여 그런 것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 … 우리 신자들은 (신비로운 것보다) 성경 말씀으로 녹아져야 한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78쪽)" 우리가 관심을 가져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 사단의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잠시 기분이 좋았을 때, 좋은 찬송을 들었을 때, 손뼉치며 즐겁게 찬송하다가 기분이 좋은 것을 성령 충만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하면서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기분을 느꼈을 때 그것이 정말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인지 스스로 분위기에 젖어서 느끼는 것이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쁨이고 감동이지 성령 충만은 아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화된 삶을 사는 것, 인격이 변하는 것,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다(갈 5:22).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열매에 있지 성령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기적을 행하는 사람보다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궂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령 충만에 가까운 사람의 모습이다.

성령 충만한 결과는 시와 찬미로 화답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엡 5:18-21). 그 결과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비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고, 사장의 태도가 달라지고, 종업원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엡5:22-6:9). 산 기도를 아무리 많이 다녀도, 봉사를 아무리 잘해도, 방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어도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이웃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과속 운전할 수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신경질적일 수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혀로 남의 마음을 찌를 수가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보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얼마나 닮아 가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성령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많은 일을 하게 된다.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엡 5:18). 성령 충만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의도적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구원을 값없이, 그저 은혜로 받는 것으로 강조하여 가르치다 보니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 생활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생활의 일부 영역이라도 감춘다면 그 분은 우리를 채우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순간 순간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 드리듯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롬 12:1). 의도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결코 성령 충만할 수 없다. 부득이 지은 죄는 수시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여 주님과의 교제가 끊기지 않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더러운 그릇을 채우시지 않는다.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때 바로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점점 더 큰 일을 맡기신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서 큰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다시 영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단번에 받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완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성령 충만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맺는 말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런 경험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도덕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신비로운 일을 하여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행 1:8). 성령 받아서 뒤집어졌으면 권능을 얻고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증인의 삶이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 충만하면 인격이 변하고 행위가 변한다. 행위가 변하지 않는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조인선 / 광주 중부교회 장로, 전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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