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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7

 

 

 

 

 

■The Sight
 

"정치도 다스리라 하시니라"

12월 대선을 앞두고 숙고해야 할 몇 가지 테마


흔히 한 나라를 배(船)에, 배에 타고 있는 선객을 국민에, 그리고 배의 키를 쥐고 조향하는 선장을 대통령에 비유하곤 한다. 아주 적절한 비유이다. 선장의 능력과 지도력에 따라 배와 선객의 안전이 결정되듯 대통령의 경륜과 지도력에 따라 나라와 국민의 안정과 행복이 결정된다.

비단 국가 경영에서만이 아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회사에서는 사장이, 군대에서는 총사령관이, 운동에서는 감독이,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공히 선장에 비유될 만큼 중요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느 단체나 기관을 책임지는 대표자요, 관리자, 경영자, 지도자라는 데 있다. 그 중에서도 최고 경영자요 지도자는 뭐니뭐니 해도 한 나라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이다.

성경에서는 왕과 백성을 목자와 양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참된 왕으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대변해 주는 그림 언어이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것은 국가 대사(大事)라고까지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 땅의 국민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숙고해야 할 몇 가지 테마를 적어 본다.

 

이번 대선이 왜 중요한가?

다가오는 12월 대선이 중요한 것은 어느 때보다도 올바른 국가 경영이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호가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는가. 아마 좌초 위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곳 하나 성한 데 없이 중병을 앓고서 곪을대로 곪아 터지는 일만 남아있다. 어디부터 메스를 가해야 할 지 모르는 이른 바 신한국병으로 이 나라의 기강은 말이 아니다. 기상천외한 부정부패의 몸통과 주범이 그대로 권좌에 있고 지역 차별과 패권으로 말미암아 동과 서는 나뉘어져 있다. 국토는 양분된 채 남한에는 맘몬신의 지배로 향락·사치풍조 만연에 끊이지 않는 살인, 강도, 강간, 사기, 환경파괴, 가정파괴, 학교폭력, 끊이지 않는 부실사고, 중소기업 도산은 물론 대기업도 휘청거리고 있으며, 절대 가치관의 붕괴로 윤리는 땅에 떨어져 그야말로 천민 자본주의의 악이 관영하고 있다.

북한은 어떠한가? 김일성 부자의 우상 통치는 더욱 더 빗장을 걸어 잠그고 좀처럼 개혁·개방을 하려 하지 않고 있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던 구호는 사라진 지 오래고, 실제로 제백성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하고 굶주려 죽게 만들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이판사판 논리로 전쟁설까지 나오고 있으니 남과 북 한반도 땅이 위기이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나라요 슬픈 민족이요 백성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자들에게 이 나라 이 민족은 현재 미래가 불투명해 보인다. 마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다가오는 대선은 시대적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다음 정부를 책임지는 자들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 국가 기강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번 대선에서 정권을 맡아 봉사할 자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지도자란 점에서도 의의를 가지며, 나아가 통일 조국의 초석을 놓아야 할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받게 될 것이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달아 오르고 있는 수평적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의미심장하다. 50년 동안이나 여당이 야당되고, 야당이 여당되는 정권교체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따라서 장기집권의 종식이 가져올 정권교체야말로 최고의 개혁작업이 되는 것이다.

 

정치 불감증과 냉소, 허무, 무관심 주의는 성경적인가?

사실,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 정치문화의 후진성을 놓고 정치 불감증과 냉소와 허무주의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게다가 국민들의 정치의식도 수준이하인 경우가 아주 많았다. 여기에는 정치 냉소와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정치권에서는 불의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고 부정부패로 유지하면서 또 불의하게 정권을 재창출한 기득권 세력이 있었다. 그런 정권에 대해 저항하고 깨우쳐야 할 지식인, 종교인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협조하고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킹메이커들이 되어 왔다. 거기에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 덕을 톡톡히 보아 왔던 변화를 원치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낮은 정치의식이 가세해, 우리 정치는 정치 불감증과 냉소, 허무주의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 정치 냉소주의의 주범은 다름아닌 지식인, 종교인 특히 기독인 중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적잖은 국민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정치 냉소와 허무주의에 빠져 정치 불감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에게 정치는 관심 밖이다. 이에 필자는 그러한 모습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정치 냉소, 무관심, 허무주의를 결코 용납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장 26∼28절의 창조(문화)명령이 미치지 않는 범위는 하나도 없다. 정치 영역도 잘 관리하고 다스리고 보존해야 할 중요한 문화 현장이다. 우리는 정치 또한 성경적 세계관의 도식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정치가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가 갖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대리통치, 위임통치로 주어진 것이 창조명령이요 문화명령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창조와 함께 온 문화명령은 정치명령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피조세계 전 영역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라는 위임통치 명령 자체가 곧 정치이다. 이것은 정치가 갖는 총체적이고도 통전적인 포괄성과 광의성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정치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공의의 수행과 집행에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의 역사가 하나님의 창조진행과 계발을 막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창조 전반에 잘 반영되고 나타나 창조와 구속역사가 진행되어 가도록, 여기에 봉사하는 큰 기관과 영역이 바로 국가이며 세속국가에 주신 정치인 것이다.

죄의 역사를 제어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역사의 진행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야말로 하나님의 공의의 선포를 반영하는 제일 사명이자 창조 목적이다. 이러한 숭고한 소명을 가진 정치가 정치 불감증과 냉소주의에 빠져 들어간 것은 타락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흔히 정치하는 사람이나 그들이 모인 정당의 제일가는 목표는 정권 획득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 자체가 정치가 갖는 한계이며, 타락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죄의 본질이 자기 주장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자기 주장 하려는 의지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이 정치계이다. 다는 아니지만,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준비도 안된 사람들이 권력의 맛을 보고 대권 경쟁에 뛰어든 것만 봐도 그렇다. 하나님의 공의를 수행함이 성경적 정치 철학이라면 정권 획득에만 정치 이상을 두는 것은 세속적 정치 철학이요 정치가 갖는 사탄성을 대변해 준다.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속 정치와 정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전제들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전제들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공의가 실현될 수 있다', '주 예수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룰 수 있는 참된 통치자요 군주이다'라는 전제이다. 이러한 절대적 전제는 다음과 같은 상대적 전제를 자연스럽게 도출해 준다. '이 세상 어떤 나라에서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어떤 통치자도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할 군주는 없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통치자는 없다'라는 전제들이다. 주로 정치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의 헛점은 이러한 전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남용함에 있다. "정치는 원래 악하고 그 누구도 어떤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고 정치의 한 단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러한 견해는 주로 근본주의 신학이나 이원론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하나님의 은혜성과 초월성으로만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내재성이 하나님 나라와 세속 정부 사이에서 함께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치에 대해서 성경적 전제와 안목을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 세속 정부와 통치자들에게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바른 관계를 위한 자세와 태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본문은 롬 13:1∼7절과 벧전 2:9∼17절에서이다.

바울은 롬 1∼11장에서 일관되게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교리를 서술하고, '그러므로'라는 대접속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속의 대경륜을 아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윗부분의 서두가 바로 롬 12:1∼2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백성의 삶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영적 예배의 범주를 우리 삶 전체로 확대해 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롬 13장에서 말하는 세속 정부와 권세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우리의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의 한 차원으로 해석해 주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건강한 시민생활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바르고 거룩한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롬 13장이나 벧전 2장을 통해서 성경은 세속정부와 권세자들에 대해 맹목적 복종을 하라거나 무조건 악하게 보거나 냉소나 무관심 할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세속정부와 권세자들이 하나님이 세워 주신 봉사자답게 공의를 선포하도록 감독감시, 때로는 저항하고, 기도로 격려하며,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까지 본이 되는 시민생활을 다함으로 그들도 하나님께 함께 영광을 돌리도록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 냉소나 허무주의에 찬동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빠져 있다면 회개하여야 한다. 그리고 보다 더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관심으로 우리의 시민생활을 바로 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세속 정부와 권세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르게 충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 드릴 중요한 영적 예배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세속 정부와 권세자들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해서 그들이 권세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까지 합리화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타락한 정치나 정부, 정치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리스도야말로 파괴된 정치를 온전히 세울 수 있는 정치의 회복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속 정부와 권세자들이나 시민정부 시민 사회의 시민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정치의 제일 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 나라 통치의 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의라 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가 전(全)우주와 피조물에까지 반영되어 하나님의 거룩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빛나는 것이라고 필자는 정의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를 방해하고 있는 타락한 죄의 역사와 그 죄의 역사가 있는 곳, 영향을 받는 사람이나 제도 등 모든 피조 세계와 문화 영역을 다 포함한다. 죄를 죄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의를 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모두가 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주로 악한 정부, 악한 통치자들에게서 하나님의 공의는 더욱 외면되고 왜곡되거나 위협받는다.

우리는 우리 정치에서 50여년 동안 이것을 수차례 경험해 오고 있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있거나 왜곡되고 탄압받아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하나님의 공의는 세속 정부나 통치자들에 의해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세워 죄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룩한 의가 나타나 그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으로, 곧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통치되고, 공의가 나타나고, 공의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그 원리를 공평의 원리, 평균의 원리, 은총의 원리, 사랑과 나눔 섬김의 원리, 샬롬(평화, 화해)의 원리, 안식의 원리로 본다. 이러한 원리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잘 집약되어 있는데 그것은 눅 4장 18∼21절에 나타난 희년의 선포에서 잘 드러난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제정과 명령은 정치적 해방, 사회적 자유, 경제적 분배(나눔)로 요약되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와 죄의 결과들 안에 갇혀 자유하지 못하는 인간과 생태계 모두에게 참자유, 참기쁨, 참해방, 참안식을 주고자 하셨다.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여러 원리들 중에서 필자는 우리 정치의 현실로 미루어 보아 특히 평균의 원리를 강조하고 싶다. 이 원리는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를 예로 들어 고린도 교회에 연보와 구제의 정신을 깨우칠 때 말한 원리로,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은 평안하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곤고한 것이 아닌, 유여한 자가 부족한 자에게 보충하여 모두가 다 평안(부요)케 되는 것이 진실된 구제, 헌금의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 정치에도 반영되어야 마땅하다.

한국 현대 정치가 후진성을 극복 못 하고 정체되는 가장 큰 원인이 지역할거주의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 정치는 지역할거주의 양상으로 치달아 답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편향된 지역 감정을 조장한 근본적인 뿌리를 찾아 도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지역 할거주의의 조장자요 주범은 군사독재정권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현 정권에까지 해당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좋은 지역 정서나 감정은 선하다. 하지만 지역 패권, 지역주의로 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정면 배치되는 악이다. 그동안 지역 감정을 조장해 정권을 잡고있는 기득권 세력들 모두가 공범이다. 그것은 지역 차별과 편중, 지역 패권에 그 원인이 있다. 한 지역은 권세 잡은 자들에 의해 존중되고, 발전되고, 또 다른 지역은 정치적 냉대 지역으로 차별하고 냉대함으로 하나의 지역 전체의 한이 누적되게 만들었다.

하나님 나라는 지역이나 계층, 신분 등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샬롬(평화)을 맛보는 것이다. 권력을 계속 쥐고 있는 자들은 이것을 선거 때마다 더욱 조장하여 자기 지역의 더 많은 유권자를 이용해 정권을 놓치 않으려 한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냉대지역의 백성들의 한은 사무쳐서 하늘에 닿을 정도이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나라에 크게 반하는 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번 대선에서와 그 이후의 역할은 자명해진다.

문병금 / 개혁신학연구원 Th.M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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