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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0

 

 

 



 

 

■커버논단

세상 속의 교회, 성경에 해법 있다

교회 문화 개혁의 방법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


문화에 있어서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소년 문화니, 성인 문화니 하는 갖가지 것들이 '문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쏟아져 나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문화라고 규정지어야 할지 사람들은 머리가 아프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머리가 아프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기독교 문화라는 것이 창조될 수 있을까?일이다.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체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문화의 주인은 하나님

문화를 한 마디로 규정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문화는 "사회생활 안에서 습득된 인위적인 것으로서 그 사회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기대되는 전부"이다. 또 사회학에서는 "사회조건 형성을 통하여 습득한 사고방식 및 행동양식의 전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삶의 터전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문화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장(場)에서 자기의 실력을 과시해 가면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과 그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칼빈주의적 문화의 개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의 계획적이며 자유스럽고 통치적인 노력"이라고 정의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문화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삶의 모든 영역을 문화로 본다면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오히려 분명해진다.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문화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문화였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 이후 문화는 끊임없는 파멸이 있었고, 인간들의 생활도 평화가 아니라 투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모든 만물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작정하신 바대로 섭리해 나가신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그림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오직 그 뜻대로만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로 세상을 바꾸자고?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저 내버려두고 바라보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인가 우리도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우리가 직접 해 보자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세상은 우리가 다스려야 하는 것이며 더러워진 세상은 마땅히 우리가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문화사역을 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개혁을 말하는 많은 교회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세상 문화를 그리스도의 문화로 바꾸어 보려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참 좋아' 보이는 이러한 생각은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들은 또 다른 이름의 타락일 수 있다. 세상 문화를 그리스도의 문화로 바꾸려는 인간의 노력은, 오히려 세상 문화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예배에도, 전도에도 문화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갔다. 대중문화에 대한 성경적 비판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화를 보는 잣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기독교 문화, 기독교 음악, 기독교 서적, 기독교 예술. 많은 부분에 기독교의 이름을 내걸고 변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적극적으로 문화를 변화시킨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것들도 실상은 세속적인 문화들을 교회 안에 들여와 그것을 성경적인 것인 양 합리화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본질은 변하지 못하는 테크닉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인정받으려는 자기위안에 불과한 일들이었다.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

이렇게 적극적으로 문화에 대응하려는 입장이 있는 반면 아예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무시해버리는 방관적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바라보는 입장도 있다. 사회의 변화나 발전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극단적으로 그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만 보면 된다는 식이다. 무서운 세상의 사상들, 위험한 사상들이 교회 안에 서서히 밀려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데도, 세상은 정신없이 변하고 있는데도 그에 대해 옳다 그르다는 말씀의 선포마저 하지 않는다. 진리를 잃어가고 있는데도 교회는 진리를 선포하지 않고, 성도들의 신앙은 주일만의 신앙으로 바뀌어간다. 그들은 주일 하루만 교인이고 예배당 문만 나서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된다. '함께 즐기고 놀기' 아니면 '거룩한 척 모른 체 하기' 증 하나다.

이들은 주위에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화와 생각을 무서워한다. 그들을 아예 정죄하고 멀리한다. 그것이 자신이 거룩하고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서 물러나서 하늘만 쳐다보는 식이다. 우리끼리 기독교 문화를 창조해서 즐기자는 태도를 가지기도 한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 역시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문화보기'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밀하는가? 적극적이어도 안 되고 방관하고만 있어도 안 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문화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의 전부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들을 관심을 가지고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존하는 것, 이것이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이다. 그것을 변화시킬 권한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문화를 거부하지도 않고 문화와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로서 본래 선했지만 인간의 죄로 타락했거나 혼돈 되어졌으며 변혁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섭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에서 말하는 변혁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문화를 바꾸어 보겠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계속 계시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그저 바라보는 관조적인 자세를 갖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역 가운데서 그 분을 발견하고 깨닫도록 하셨으며, 그것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 우리의 목적을 두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소극적인 삶이 아니냐고 비웃는다.

관조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선포하지 않는 것은 개혁되어야 할 삶이다. 그러나 관조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표현하되 그것을 바꾸거나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리를 나타내시도록 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이 순례자이며 나그네와 같기 때문이다. 관조의 삶은 전 삶을 통해 마치 외인처럼 이 땅에서의 삶과 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나그네가 적극적이면 그 사회는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그네의 목적은 아니다.

관조의 삶을 산다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변화와 소동에 특별히 민감하고 적극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 것을 말한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무관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민감하게 반응하되 영향을 받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은, 그 변화를 다 인식하고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것에 휩쓸리고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하고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며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관조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지키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삶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건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살려는 결단이 선 우리를 세상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혈육을 가진 인간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지배와 권력과 이 시대를 다스리는 암흑의 세력과 하늘에 있는 허다한 악한 영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엡 6: 12)"이기 때문에 그렇다.

개혁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모든 생활에서 주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개혁 사상의 되풀이가 아니다. 그것은 '성서만으로'라고 하는 종교개혁 정신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적용시켜 나가며 오늘날에도 구현시키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원리는 오직 성경에 드러나 있으며 우리의 삶은 오직 성경에 근거를 둔 삶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성경에 의한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오로지" 그것이 전부이다.

글 : 김후지 기자(huj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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