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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0

 

 

 



 

 

■커버논문 (발췌요약)

21세기 한국 교회의 전망

한국 개혁교회의 흐름, 문제점, 그리고 전망에 대한 논고
 

<TheVoice>는 지난 5월호에서 약속한 대로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연속 기획의 총 결론에 해당하는 논문을 싣는다. 이 글은 총신, 고신, 합신대학원 원우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세미나에 발표된 논문 3편 중에서 채택된 것이며, 전체 논문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부분을 요약·발췌하였다. <편집자주>

바른 신학은 바른 교회의 토대이며, 바른 생활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한국 교회를 진리 안에서 굳건히 서게 하는 원동력은 어떤 방법과 수단에 있지 않고, 먼저 바른 신학을 부단히 연구함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개혁신학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 사상'과 '성경의 신적 권위'에 확고히 서 있는 것이라 하겠다.
 

신학의 방법

신학의 좋은 방법은 성경과 교회의 고백과 기독교적 인식들을 모두 고려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는 종합적인 방법이다.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나 철학적인 사색에 의존할 수 없고,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성도의 교통과 그 신앙고백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진리로 인도하실 성령의 약속을 모든 교회에 성취하고 계시며, 성령은 여러 세대를 통하여 진리로 교회를 바로 인도하시기에, 교리사는 성경의 설명이요, 성경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신학을 함에 있어서 자기 교단의 독특한 신앙과 생활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전 기독교회의 신앙고백과 과거의 교회 역사를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자는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신학을 세우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나열하는 것은 진리와 신앙을 분리시키는 일이 되고, 외식하는 것이며, 남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야 하며, 바른 믿음과 성령의 지혜와 은혜가 충만하여 신령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계시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자의 신학은 성경적인 신학 수립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신학자는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필요한데, 그것은 성령은 "교회의 교사"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신조나 개인의 주관적 신앙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한 원리"인 것이다. 즉 개인의 주관은 객관적인 표준이 확고부동하게 섰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 장로교의 흐름과 전망

교회의 신조나 개인의 주관적 신앙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한 원리"인 것이다. 즉 개인의 주관은 객관적인 표준이 확고부동하게 섰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헤페는 로마교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칭하여 복음주의자로 불렀다면, 루터파는 성만찬과 기독론에서 루터의 입장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통칭하여 복음주의 개혁파라 불렀다. 바빙크는 개혁주의의 근본사상은 쯔빙글리부터 시작되며 개혁주의와 루터주의의 차이는 원리에서부터 기초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이 두 차이는 신론적 신학과 인간론적인 신학의 차이와 신학의 핵심에 있어서 선택과 칭의의 차이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형상, 원죄, 그리스도의 인격, 구원의 서정, 성례, 교회정치, 윤리 등의 교리에까지 논쟁이 된 것이라 하였다.

칼빈에 의해서 종합되고 체계화된 개혁신학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한 시대나 장소에 한정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지역에 따라서 새로운 성격과 특특한 양상 혹은 혼탁하고 혼합된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한국 개혁신학의 흐름

개혁신학의 전망을 살피기 위해서는 한국 개혁신학의 초기 역사를 살피는 것이 필요한데, 한국 교회는 피 선교국이므로 영미 교회의 선교사의 배경을 살피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미국 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부 총재였던 '브라운'은 1911년까지의 선교사에 대하여 평하기를 '안식일을 엄격히 지키고, 댄스, 흡연, 카드놀이 하는 것을 신자가 빠져서는 안 되는 죄악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청교도형의 인간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신학과 성경 비평학에 있어서 강한 보수주의였고, 종말론에 있어서 전천년설적 견해를 가지며, 고등 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을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부흥 운동에 적극적이었고, 모든 한국교회가 반드시 장로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1905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 회의에서 단일한 조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치하려고 합의를 보았을 정도로 관용적이었다. 즉, 1907년 장로교 독노회가 형성되기 전후의 선교정책의 분위기는 복음주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를 만들려는 분위기였다.

19세기 중엽부터 복음주의와 부흥 운동이 교파를 초월하여 세계 선교에 협력하는 시대적 환경으로 미국 장로교 내에서 엄격한 칼빈주의를 고수하려는 경향이 퇴조되었고, 신앙고백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분위기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려는 시도가 일어났고, 그 배경에서 인도 장로교회의 12신조가 나오게 된 것이다. 1907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12신조를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12신조를 덮어둔 채 교회의 신학, 즉 교회의 신앙고백은 없는 상태로 지내왔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라는 시련을 당하면서 교회의 분열의 아픔을 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정치에만 관심을 가지고 교회의 신앙고백을 점검하고 검토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1920년대는 본격적으로 자유주의 신학 입장을 가진 자들, 다시 말해 맑스주의 운동, 사회 복음주의, 자유주의 현대사상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박형용 박사는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 양상을 강하게 소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한국 보수장로교회의 신학적 특성이 되었다. 박형용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념을 조장하는 데 그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한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은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하는 근본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즉, 그 신학은 정통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한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전통과 영미의 전통을 동시에 수용한 대표적인 인물로 박윤선 박사를 들 수 있다. 그의 개혁주의 원리들로 하나님의 주권, 성경의 권위, 종으로서의 인간관,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와 수용, 그리고 일반은총의 수용 등에서 보듯이 그의 신학은 화란신학의 노선에서 칼빈을 수용하며, 개혁신학을 소개하고 정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교회의 문제점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기보다는 목회 성공이나 교회 성장을 강조하는 분위기이다. 교세로 목회자의 역량을 평가하고, 진리의 선포보다는 성공과 부흥에 한국교회는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새들백 교회, 전도폭발, 다락방전도, 은사 운동 등과 같은 성장 위주의 교회 모습은 진리의 표준인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열린 예배는 성경과 전통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 결과로 여겨진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세력들 중의 하나는 현대의 은사 운동을 들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초교파적이며, 범연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 운동은 교회의 순수성이나 신앙고백에 대하여는 전혀 무관심하며, '방언' 같은 특별한 체험의 간증을 강조하며, 교회의 역사적인 고백이나 교리보다는 각자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와 여러 계시적 은사들을 포함하여 성령의 대부분의 은사들이 오늘의 교회에도 적법하게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분명 잘못된 계시관에서 나오는 것이며, 계시적 은사가 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교회 생활로부터 종결되었다는 장로 교회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대부분의 이단 운동은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새 예언', 혹은 '새 계시'라는 거짓 계시를 주장하는 점이다. 이들은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고 신적 계시의 직접성과 '계시의 계속성'을 주장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2세기의 몬타누스의 신비사상에 나타난 잘못된 계시관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여전히 존속하여 교회의 큰 혼란을 주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새 계시들이나 인간적인 전통들을 거부하며 그 어느 것도 교회적 삶과 신앙의 적법한 자료로 여기지 않았다.
 

한국 개혁신학의 위기

각 시대마다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명료하게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시도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양 진리를 확증하고 양자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였고, 창조적인 긴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중세시대에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간의 균형을 공간적인 개념에 호소하면서 창조주로서, 구속주로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일차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현존하시는 분으로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는 절대적인 지식과 확신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이성의 중개를 통하여 피조물과 창조주를 인식하려고 하였다.

19세기 사상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균형을 새롭게 추구하고자 하였으나 '이성의 시대'의 '내재주의적 잔재'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20세기 신학자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균형을 새롭게 추구하고자 하여,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의 적합한 새로운 모델과 새로운 신학의 방법론을 정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양자의 불균형으로 인한 불안정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러한 불안정은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긴장을 증폭시켜 신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없애 버리고자 하는 허무주의의 양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계 위에 계시고 이 세계를 넘어서 초월의 세계에서 오시는 자충족적인 분이시다. 또한 그 하나님은 역사 안에, 자연적 과정 안에 관여하시면서 이 세상 속에 활동하시는 현존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한국 개혁신학의 전망

현대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다원주의의 접근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근본주의적이며 보수적이며, 중도적이며, 자유적인 또는 급진적인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여러 신학적 사조들, 즉 실존 신학, 과정 신학, 세속 신학, 희망의 신학, 해방 신학, 정치 신학, 여성 신학, 설화 신학 등은 한국 개혁교회의 바른 신학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다양한 계시관의 그 뿌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고도의 신학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먼저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서 그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개혁신학의 바른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는 결코 다른 입장들을 평가할 수 없고 도리어 우리의 신학의 독특한 성격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1세기는 인간복제까지 가능하게 된 유전공학의 기술이나 시간유전자의 발견과 같은 더욱 첨단화된 과학기술의 예측 불가능한 시대라 하겠다. 그래서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신학의 문제가 제기될 것은 당연한 문제라 할 것이다.

수많은 계시관의 유형들은 여러 다른 사조들과 연합하고 혼합되므로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등장함을 보게 된다. 신학적인 흐름을 살필 때, 전통신학의 몰락 원인은 매 시대마다 신학과 철학을 절충하고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가 상실되고 인간의 이성의 자율성이 강조되고, 그것이 신학의 출발점이 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내재성의 균형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바른 "계시관"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조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계 위에 계시고 이 세계를 넘어서 초월의 세계에서 오시는 자충족적인 분이시다. 또한 그 하나님은 역사 안에, 자연적 과정 안에 관여하시면서 이 세상 속에 활동하시는, 현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화는 단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균형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성경의 신적 권위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21세기 한국 개혁주의 전망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바른 해석을 근거로 모든 문제를 접근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가는 한국 개혁교회가 아니라 이 시대의 문제를 성경의 관점에서 바로 해석하여 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교회이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개혁주의 바른 전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을 연구함에 있어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종교개혁이 된(reformata)'것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항상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그 원리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그 개혁의 깃발을 들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성경의 원리에 따라 해석된 신조들을 면밀히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넷째는 개혁신학의 근거인 성경을 제대로 파악하는 주경 실력을 함양하여 올바른 주석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다섯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의 경건한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결론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계시관에 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성경을 보는 관점, 문화를 보는 관점, 성도의 경건은 바른 계시관에서 나온다고 하겠다. 한국 개혁교회는 바른 계시관에 기초한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 그릇된 신학으로 인도되며, 따라서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하며, 신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개혁은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성경을 기초로 하여 바른 신학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개혁주의란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에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나 신조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백들은 바로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하여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개혁교회의 과제는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한 그 말씀에 근거한 개혁주의 신조들을 받는 데서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 한국 개혁주의 장로교의 정체성은 바로 이러한 바른 계시관에 근거한 성경해석에 있는 것이다. 즉 계시의 근원 뿐 아니라 그 계시의 내용도 삼위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믿고 고백하며, 또한 그 최종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개혁주의의 확고한 전제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 개혁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는 결국 특별계시인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절대 권위와 바른 성경 해석은 한국 개혁교회가 회복하고 추구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해지며,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그같은 믿음을 가진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을 성경과 교회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계시관"은 한국 개혁교회의 기본정신이자 기본원리가 되어야 한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나장열 / 합동신학대학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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