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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2

 

 

 

 

 

 

사람이 희망입니다

본문 : 창세기 1장 26∼28절, 에베소서 1장 14절 말씀


박은식 목사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것보다 놀랍고 경이로운 말씀은 일찍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창조의 날들이 바뀔 때마다 반복하여 등장하는 말씀은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5, 8, 13, 19, 23, 31절)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창조와 희망의 새 아침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큰 일이며 역사이다. 혼돈과 흑암과 공허와 깊음의 어두움이, 질서와 광명과 충만으로 창조되는 순간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다.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놀랍고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최고의 절정에 달하는 것, 가장 큰 감격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창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모든 창조 세계를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희망이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사람에게 주셨고 그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것을 기뻐하셨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도 창조에 명하셨던 대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감격과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온통 혼돈과 흑암과 공허함이 세상에 가득하다. 우리 삶의 환경과 우리 자신들을 보면 과연 '하나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전혀 확신할 수가 없다. 가치의 혼돈, 영적인 흑암, 인생의 공허함이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소망에 우리의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처음이면서 마지막 희망은 사람이어야 한다. 구세군의 창설자 Wiliam Booth 대장은 영국 황제 Edword 7세로부터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문예에 소망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명예에 소망을 두고 어떤 사람은 황금에 소망을 두지만 소인의 대망은 사람에게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편 145편 19절에도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고 말씀한다. 또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에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람에게 희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희망이었던 시절은 지나간 듯 하다. 그래서 '너희들만 잘 살면 된다, 우리는 우리 알아서 살겠다'라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쉽게 터져 나오고 있다. 스승이 제자를 희망으로 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제자를 두려워하는 시대가 되었다. 젊은이가 조국과 민족의 희망이어야 하는데 그 희망은 자꾸만 희미해져 간다. 그래서 염려하고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이 많다.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는 부모가 자녀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게 되는 것, 나라의 젊은이들이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게 되는 것, 그 희망을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가 주일학교에 희망을 걸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관한 모든 것을 사람에게 향한 소망에 두셨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희망을 창조할 수 있을까?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세계 경영의 권한을 위임하신다. 하나님이 지은 사람 아담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았음을 알고 순종했을 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었다. 창세기 2장 15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와,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이름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 없이도 이 세상을 다스리며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는 깨어지고 세상은 무질서와 어두움 가운데 처하게 되고 말았다. 사람 자신도 죄 아래 있게 됨으로 더 이상 창조의 면류관으로서의 자유와 영광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과 어두움의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창조의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둘째, 불타는 소원을 가진 사람이다. 불타는 소원을 가진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가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이다. 둘째 창의력이 있는 사람이다. 셋째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다. 상상력 즉 꿈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다. 넷째 식을 줄 모르는 열심을 가진 사람이다. 다섯째 자신을 연단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집중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불타는 소원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는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자신을 부르셨음을 확신하였다. 그는 자신이 쓴 서신서 서두에서 그의 사도 됨의 확신에 찬 어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보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확신에 찬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한 열정에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John knox 목사의 소원은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불타는 소원으로 스코틀랜드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의 평생 소원은 '조국의 통일'이었다. 통일 된 조국을 향한 그의 소원은 지금도 우리 민족의 가슴에 희망과 용기로 남아 있다. 환경에 굴복하고 사람에게 실망하여 소망을 잃어 가는 이 시대를 향하여 불타는 소원으로 희망을 창조해 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셋째, 다가올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오늘 우리는 불안하다. 잠시도 평안을 갖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 삶은 불안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크는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 갇혀 감옥 안에서 죽어 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친구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 창 밖을 보십시오. 저 회색 담벼락이 아닌 그 너머에 푸른 하늘을 보십시오. 밤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당장 처해 있는 현실만을 바라보며 절망할 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푸른 하늘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밤하늘의 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젊은 일꾼들을 길러 낼 때 가능한 일이다.

야곱 가족의 어두움의 때를 위하여 하나님은 요셉을 기르셨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해야만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절망의 때를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준비하셨다. 약속의 땅 가나안의 세속 문화와 이방신, 이방 족속을 인한 역사의 어두움을 위해 하나님은 젊은 여호수아를 준비해 두셨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추상같은 위엄 앞에 삶의 소망을 포기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젊은 일꾼들을 역사와 민족의 어두움의 때를 위하여 준비하셨다.

교회에게는 이 사명이 주어져 있다. 우리 사회가 갖는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숨 쉬고 탄식하는 때를 위하여 교회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일꾼을 길러야 한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젊은이들이 선지자 하박국처럼 하나님이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야 한다. 희망을 창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넷째, 새로워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앨빈 토플러는 21세기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 정부, 경제계, 교육계와 모든 종교계 일체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하였다. 변화의 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새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면 새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식으로는 새롭게 되지 못한다. 명예나 권력으로 새롭게 되지 못한다. 이런 것들로 사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의 혼돈과 무질서와 공허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도리어 타락함으로부터 인간을 더욱 헤어날 수 없게 만든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인생은 예수 안에서 진정으로 새롭게 될 수 있다. 흑암과 혼돈이 가득한 세상, 죄악 가운데 부패한 인생들을 새롭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 말씀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되어 있다. 또 이사야 65장 17절에서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역사를 사람을 통해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미래를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찾으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심을 믿는 사람, 불타는 소원을 가진 사람,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만이 희망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새로운 피조물을 예수 안에서 창조하셨다. 예수 안에서 만물이 새로워진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이 새로워진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말씀하실 때 그 아침은 새로운 역사의 아침이었다. 오늘이 어두움이면 하나님은 아침을 예비하고 계신다. 창조의 아침, 새 역사의 아침이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 된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희망으로 쓰임 받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박은식 / 성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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