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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3

 

 

 

 

 

 


신앙 위해 걸오온 길 - 27년간의 식당생활 이야기다섯 살 짜리 꼬마에서부터 고등학생들까지, 백 일곱 명이나 되는 식구가 한 집에 살고 있는 이 곳, 여기는 광주 송암동에 위치한 '신애원'이라는 고아원이다. 이 식구들의 끼니를 책임지고 계시는 오순애 권사님(63세, 은성교회)은 이제 누가 뭐래도 신애원의 한 식구이다. 그 많고 많은 날들, 어렵고 힘들기만 했던 날들이 이제는 다 지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아픔들은 눈가에 주름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오랜 산고 끝에 옥동자를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이 지금 그녀에겐 있다. 그 어려웠던 시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며오는 그 때의 아픔들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처럼 웃으며 할 수 있으니까.


가장이 되어서

목포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그녀에게 불행은 갑자기 찾아들었다. 하나도 못 낳는 아들을 넷이나 낳아 이제 막 가르치는 재미를 보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남편과의 사별. 그녀는 순식간에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렸다. 어린 아들 넷을 책임져야만 하는 무거운 짐이 그녀에게 지워졌다. 달리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남편과의 추억을 남겨둔 채 목포에서의 생활을 청산한다.

넷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광주로 올라왔을 때, 그녀의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아는 사람도, 갈 만한 곳도 없었다. 딱히 의지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손놓고 앉아만 있을 형편도 못 되었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 아들들이 있었다.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책임이 그녀에게 있었다. 하지만 자식 딸린 여자를 선뜻 반기는 곳은 없었다. 그 때 가장 그녀를 유혹했던 것이 식당 일이었다.

"여자가 가서 일하기에 식당만큼 좋은 곳은 없지. 하지만 젊은 여자가 식당에 있는 것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고, 또 괜찮다 싶은 데는 꼭 막내를 떼어놓고 오라고 해서 결국 가지 못했지."

하지만 그녀가 일반 식당 일을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던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오랜 동안 그녀가 유일하게 지켜온 신앙. 그것 때문이었다. 혼자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던 그녀는 친정 식구들을 다 전도해 신앙생활을 하게 만든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이 식당으로의 길을 막았다.

"식당으로 들어가면 주일을 제대로 지킬 수 없을 것 같더라고. 애들은 둘째치고, 우선 신앙을 버려가면서까지 먹고 살 수는 없었지. 신앙을 지키려니, 도저히 식당으로 갈 수가 없었어."

혼자 몸이 된 그녀에게 유일한 의지처는 하나님 한 분뿐이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친구였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그녀는 식당에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른 길을 찾았다. 그 때 그녀에게 뻗친 도움의 손길이 바로 신애원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있던 신애원 원장님께서 신애원 식당 자리를 소개해 주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식들도 돌볼 수 있는, 그녀가 그렇게도 바랬던 자리가 그녀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고생이 다 끝난 것은 아니고

다행히 신애원이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덕분에 주일은 마음껏 교회를 섬길 수 있었고, 불쌍하고 어려운 어린이들을 돌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다고 놀고먹을 만큼 편한 곳은 아니었다.

"고생을 말로 다 못하지. 그 때는 다 어려운 때라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그 때는 밥이 없어서 애들한테 밥을 못 줄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서 돈을 받는 형편에 편한 생활을 살 수 있었겠나."

그래도 항상 제 집 일처럼 아이들을 챙겨주고 열심히 일을 봐 주시는 오 권사님은,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보다는 좀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단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고 오히려 베테랑으로서의 존경을 받았다고 누군가 귀뜸을 한다.

하루 세끼, 신애원 아이들의 식사는 모조리 권사님 손에 달려있다. 함께 일 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더 계시지만 출퇴근을 하시기 때문에 권사님은 더 많은 준비를 해야만 한다. 눈을 떠서 아침을 준비하고 아침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 그리고 이제 아침이 끝났나 싶으면 또 점심준비. 저녁때까지 잠시나마 편안하게 누워 있을 만한 여유가 없다. 그나마 방학 때는 나은 편이다. 개학을 해서 도시락을 싸게 되면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다. 어떤 때는 아침에 백 이십 개의 도시락을 싸기도 한다. 보통은 삼십여 개의 도시락을 준비한다.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그 많은 도시락이 권사님의 손을 거친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부지런히 준비를 해야만 아이들 도시락을 다 챙겨 보낼 수 있다. 힘도 들지만 그것들이 다 권사님의 27년의 세월을 이루어 왔다.

매일을 그렇게 분주하고 정신없이 보내면서도 권사님은 당당히 아들 넷을 훌륭히 키워내셨다. 막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정을 이루어 산다고 말씀하시는 권사님의 입가에 웃음이 가실 줄 모른다. 예전에 어렵고 곤란한 생활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제는 좀 쉬고 싶을 때도 되셨겠다 싶지만, 네 아들들을 다 키우고서도 권사님은 신애원을 떠날 생각이 아직 없으시다.

"나가라면 나가야겠지. 지금까지 있으라고 해서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조금 더 여기 머물면서 일을 계속 하고 싶어."

때로 신애원 아이들을 향해 꾸지람도 하시고 호통도 치시지만, 이것이 모두 신애원 아이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권사님의 마음의 표현이다.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위하기 때문에…. 기어이 따끈한 밥을 지어 먹이는 친어머니의 심정이 권사님에겐 있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지만.

 

하나님만이 내 의지처

"어렵고 힘들 때가 많았지만 내 나름대로는 교회에 가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사했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내가 선택한 곳이니 감사히 일해야지. 자식들도 다 키웠고. "

젊은 여인의 몸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자식들을 키우느라 삶이 고되고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남편 없는 외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재혼에 대한 유혹이나 말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신앙 안에서 자식들을 잘 길러 내는 데만 힘을 쏟았던 권사님이기에 이제는 그녀를 두고 입방아를 찧을 사람은 없다.

외로울 때도 참 많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셨다는 권사님은 예나 지금이나 혼자이다. 재혼은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이고, 장성한 자식들 신세도 지지 않으려 하신다. 권사님의 바램은 꼭 하나 뿐이다.

"아직 몸이 성할 때 좀 더 일하다가 나 혼자 살 수 있을 만하면 그만 하고 싶어. 나도 힘이 들고, 이제는 예수 잘 믿으면서 편안히 살고 싶어."

자식들 앞에서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권사님은 당당하다. 그녀가 선택한 이 길이 오직 신앙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하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김후지 기자(huj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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