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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ght - 문화비평
이미 알고있는 이야기지만 너스레를 떨자면, 서태지는 구십 년대 초반,
이십대 중심의 대중 문화를 특히 가요 문화를 일순간에 십대들의
천국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모든 스타들의 표준은 서태지였고, 서태지
은퇴 이후의 모든 십대 스타들은 서태지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태지가 촌스럽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적당한 수준의 진보적 음악 때문일 것이다. 구십년대초 아직은 생소한 랩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난 알아요'를
필두로 그의 충격 요법 행보는 시작된다. 그러나 결코 지나치게 앞서는
법이 없었다. 너무 앞서가다 보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슬아슬한 상업성의 줄타기.
그가 다시 돌아왔다. 지난 96년 1월 31일 은퇴 선언을 하고 대중들로부터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일단은 부러움이다. 예약판매만 해서 벌써 백만장이 팔려나갔다는 그의 영향력은 실로 부러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경기 악화로 침체의 사회적 물결은 음반 시장까지 장악했으나, 서태지의 컴백으로 대중 음악계는 비상구를 찾게 될 것이라는 기대 어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나온다. 수년 전 팔십 년대 적이지도, 그렇다고 구십 년대 적이지도 않던 시기에 단번에 정상의 자리로 올라섰던 서태지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침체된 음반 시장의 구원과 대중문화의 진일보라는 무거운 책무를 짊어지고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푸념을 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기독교 음악의 열세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크리스천 음악 사역에 대한 교계의 인식이 아직 좋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세기말을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여전히 '새벽종이 울렸네',
하던 시대의 시선으로 음악 사역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독교 음악의
성장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음악
사역자 당사자들에게도 왜 크리스천 음악을 하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목소리가 있다. 거기에 음악 사역자와 제작자
사이와의 불화, 상업성으로 치달아 가는 음반 유통 과정, 전문성의 결여
등이 CCM 사역 미약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거기다가 열악한
마케팅 체계, 그리고 너무나 분명한 크리스천 뮤직과 넌크리스천 뮤직의
구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라 여겨진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음악 사역의 시장 규모. 시장 규모가 곧 대중적 영향력임을 성급하게 인정한다면 정말이지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빨리 기독교 산업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을 정립해나가지 않는다면, 영영 음악 사역은 이러한 파괴력 앞에 열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정직하고 투명한 크리스천 실업가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좋은 앨범을 잡기 위해 자기 살을 깎으면서 까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작금의 제작자, 유통 업체의 질서가 재편되지 않는 한 크리스천 음악은 성공할 수 없다. 가수들 역시 눈앞의 이익을 추종하기보다 자신의 사역이 곧 문화선교사의 사역임을 깊이 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한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성경의 역사를 들추어볼 때 서태지는 두려운 존재다. 우리에게 서태지를 막을 만한 혹은 서태지를 극복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음악 사역자는 있는가. 어느 PC 통신 업체에는 온라인 서태지 박물관이 개설되는 등 세상은 그의 컴백을 놓고 떠들썩한데, 진정 우리가 입을 모아야 할 그리스도의 컴백을 노래할 영향력 있는 가수는 있는가, 그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언대, 저마다의 입술에 찬양의 열매를 달아줄 아름다운 음악 선교사는 과연 언제쯤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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