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8월-9월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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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정보 1 ; 96년 8-9월 상황 >
자료수집기간 : 96년 9월27-10월4일. 수집장소 :
중국길림성 연길. 훈춘 및 두만강변. 수집방법 :
중국과 북한 국경지역의 일반적인 소문취합 및
소문에 대한 추적, 최근에 북한을 방문한
조선들에 대한 면접. 기록일 10월 10일. 수집자 :
통일강냉이 k
1) 중조변경
중국쪽 변경에서 버려진 채 혼자서 우는 아이
96년 10월1일 두만강변 중국쪽(도문)에서 한
어린아이(9세정도)가 울고 있음을 조선족들이
발견했다. 왜 울고있느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강가에
도착했어요, 아버지가 이쪽 강변을 가르키며
너는 무조건 이 강을 건너 저 강건너 쪽에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목에 무등을 태워
강을 건네 주고는 울면서 다시 강건너 쪽으로
헤엄쳐 갔어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중국쪽에 사는 어느 조선족이 데려가 기르고
있다고 한다 ; 훈춘시 조선족 정00씨 증언
2) 노인,
아이들의 줄 초상과 인육먹는다는 소식
제발 와 달라는 전화와 편지가 자주왔는데, 그
내용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절박한 사연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방문을 결심 함.
임시통행증을 통해 입북한 후, 길을 지나가는데
뒤에서 몇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 사람은 실하니 고기 맛이 고소
하겠다”라는 소리였다. 소름이 오싹끼쳐 방문을
급히 마치고 돌아왔다.
방문한 친척들 집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고기를 베어서 먹는다”,
“부모가 죽으면 무덤에 묻은 후 시체가
썩기까지 지킨다. 다른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파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노인과
아이들이 너무 많이 죽어나가 줄 초상이 나는
바람에 정부에서 관 조차 줄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죽은 곳에는 사회안전부 요원들이 나와서
이제는 울지도 못하게 한다“ ; 연변 TV 방송국 000
0장, 96년9월15일 함경도 외사촌 가족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증언
3) 강물에
버려지는 어린아이
도문과 훈춘사이에 ‘양수’라는 곳이 있다.
강건너 북한지명은 ‘온성’이다. 96년 9월
첫째주에 양수의 두만강변 밭에서 일하던 현0아
엄아와 아빠는 기이한 사건을 목격하였다.
강건너(두만강)에서 아기울음 소리가 나서
바라보니, 한 북한인 부부가 아이를 요람에 넣어
물에 띄어 내려 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이쪽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그저 울며 돌아갔다.
얼마 후 아이를 담은 요람은 물속으로 가라
앉았다. 사건을 목격한 이들 부부의 소견은 너무
배가 고파 더 이상 아이를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 조선족 현0 엄마,아빠의
증언
4) 두만강변의
옥수수 밭
두만강 건너 북한쪽 옥수수 밭이 겉보기에
그대로 유지되는 이유는, 북한군 병사가 보초를
서서 일절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키기 때문이다.
야간에도 없는 전기를 사용하여 탐조등을
비춰가며 경비를 한다. ; 훈춘시 조선족 정00씨
증언
5) 중국농촌
총각과 결혼해 도망하는 북한 처녀들
중조국경 마을인 화룡(두만강 상류) 지역은
강폭이 불과 10여미터 정도인 곳이 많은데,
이곳으로 북한 처녀들이 많이 도망해 와서,
중국의 농촌 총각과 결혼하여 중국내지로
달아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중국농촌 총각은
정말로 일자무식자들이고, 북한 처녀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이 많은데 현격한 지적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생존문제의
절박함을 뜻한다고 한다 ; 연길시 조선족 이00씨
증언
6) 북한인들의
야간 월경과 뼈만 남은 강아지
남평에 있는 형집은 두만강변인데 밤이면 강을
건너와 손을 벌리고 쌀을 달라며 애원하는
북한사람들이 많다. 한번은 몇번 왔던 사람이 또
왔는데, 미안해서 였던지 강아지 새끼 한마리를
쌀과 바꾸자고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보니
뼈와 가죽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형이 그
사람들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아이를 잡아서
김장독에 젖을 담아 먹는 사람도 있다’는 말도
들었다 ;연길시 조선족 이00씨 증언
7) 북한내부의
조선전쟁설
96년 10월 1일 훈춘의 박00씨 집에 왔다 돌아간
북한인 친척은,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 될 것 같다.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면서, 올해 대 조선전쟁이
난다는 말을 하고 돌아감. 수집자가 직접 그를
만가기를 청했으나 북한 특무(스파이)들이 많이
깔려있어서 만나는 것이 발각되면 둘다
목숨보존하기 어려워서 안된다고 거절 ; 훈춘시
조선족 박00씨 증언
8) 강이 얼어붙는
겨울을 걱정하는 두만강변 중국인들
굶주린 북한 사람들이 강을 건너와 중국사람들의
소를 잡아가고, 강변의 곡식을 훔쳐가는 일이
너무 많아서, 두만강변에 사는 중국쪽 사람들은
벌써 올 겨울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강이 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넘어올 것이기 때문에.. ;
연길시 조선족 이00씨 증언
9) 손바닥과 코에
쇠갈구리 끼워져서 끌려가는 탈북청년
96년 초, 겨울에 17살된 한 북한 청년이 새벽3시경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 중국 도문의 시환자
쪽으로 탈출을 하였다. 한 중국인 집의 문을
두드려 밥을 얻어먹고 나오는데, 옷 차림이
허름해서 중국공안에 붙들려 북한으로
돌려보내졌다. 그 청년은 북한 변경수비대에
인계되자 마자 손바닥과 코에 쇠갈구리가
끼워졌다. 그리고 쇠갈구리 줄에 끌려서
북한으로 돌아갔다. 중국 공안들이 탈북자
한명을 붙들어 북한으로 인계하면 인민페 3,000원(한화30만원)을
북한으로 부터 받는다. 조선족 공안들은
탈북자들이 잡히면 이들이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질 경우 처형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가만히 풀어준다. 그러나 한족 공안에게
잡히면 모두 북쪽으로 넘겨진다 ; 훈춘시 공안원
000씨 증언
10) 한발늦은
구원
친동생(00세)이 이곳(00)의 공안인데, 지난해 12월에
야간 근무를 하던 중 한 북한 청년이 탈북해
왔다가 공안대로 붙들려왔다. 밤12시경 동생이
잠자고 있는 나에게 전화를 하여 “야를 보내면
죽을것이 뻔한데 어떡하면 좋겠냐‘고 해서,
도망가게 도와주자고 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가서 공안대 앞에다 문을 열어놓기로 하고,
동생은 수갑을 찬 채 도망을 갔다고 다른
공안들에게는 변명하기로 약속하였는데, 택시를
타고 도착했더니 이미 국경수비대 20여명이 와서
그를 인수하고 있었다. 결국은 그를 도망시키지
못했고, 다음날 아침 그는 코에 철사를 끼워
끌려갔다 ; 훈춘시 조선족 박00씨 형제의 증언
11) 중국에
월경하여 굴파고 살던 북한인 체포되어 북에
인계
배가고파 북에서 살지 못한 두만강변의
북한주민이 몰래 국경을 넘어와 중국쪽 개산툰의
한 야산에서 굴을 파놓고 살고 있었다. 어느
중국인의 신고에 의해 발각되었다. 신고가
들어가자 중국의 변방부대가 포위하여 그를
채포하여 북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연길시 조선족 00희씨 증언
12) 노래방의
접대부와 스파이
한 북한 처녀가 중국으로 건너와 도문의
노래방에서 일을 하며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번
여름(96년) 밤에 한 남자를 접대하였는데, 그
남자가 북한 특무(스파이)였다. 다음날 아침 그
여자는 철사에 코뚤려서 잡혀갔다 ; 연길시
조선족 박00씨 증언
13)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북한의 어린이와 노인들
15일전(96년 9월 12일경) 북한에 다녀온 한 중국의
조선족은, 북한 아이들의 키가 아주작고, 배가
불뚝하고, 다리는 모두 심하게 기형적으로
굽었다고 한다. 영양실조로 인해 노인과 아이는
다 죽어가고 있다 ; 연길시 조선족 박00씨 증언
14) 북으로 부터
받은 편지
96년 9월 30일 연길사는 조선족 김00씨의 가족에게
북에있는 친척으로 부터 편지가 왔다. 그
편지에는 “배가 고파서 아이를 뜯어먹고
있다”고 써 있었다. 이들 친척들은 이 편지를
받고 모두 모여 몇일째 울고 있다. 편지를 얻고
싶다고 요청 하였으나, 이 편지가 혹시 알려지면
북에 있는 친척이 죽는다며 가족들은 편지
내놓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 편지입수를 위해
계속 이들 가족과 접촉 중 ; 연길시 조선족 김00씨
증언
15) 죽기를
대기하며 순서대로 방에 누워있는 사람들
회령에서 00리 떠어진 0000에 있는 큰아버지댁을
방문했다. 큰아버지 2째딸인 사촌이 이곳에
사는데, 큰어머님이 둘째딸집에 살아서 그곳까지
찾아가게 되었다. 사촌부부와 0000, 4명의 조카(0,00,00,00세)
등 7명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 도착했을때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사촌누이 1명만 빼고 모두
방안에 누워있었는데, 움직이지 못하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5일전 부터는
힘이 없어서 풀 조차도 뜯어 먹지 못하고 모두
굶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부황기로 얼굴이
누렇게 붓고 떠서 얼굴과 머리가 갈라터져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착한 후 밥을 해서
먹는데, 어찌나 많이 먹던지 밤 12시경에 모두
배탈이 나서 큰 소동이 또 한차례 벌어졌다. 4일째
되던날 모두 기운을 회복하고 일어나 걸었다.
기운을
차린 사촌누이가 손님을 대접하겠다고 우겨서
회령시장에 함께 동행하게 되었는데, 회령시장
물가는 중국제 쌀1키로에 130원, 밀가루1키로에 100원,
강냉이가 1키로에 70원, 사탕1개에 10원씩 하였다.
그런데 사탕은 돌아오는날에 보니 1개에 85원으로
15원이 올라있었다. 북한사람들의 한달 월급은 80원.
시장 식료품 상점에 가니 물건을 진열해 놓고
그물을 쳐놓았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배고픈
사람이 물건을 덮쳐서 입에다 넣으면 다시
빼내지는 못하니까라고 답변했다. 시장에서 한
주민이 꼭 사람주먹만한 수박 한 개를 놓고 팔고
있어서 가격을 물어보니 40원이었는데, 사촌이
손님접대한다며 우겨서 그 수박을 사서 먹기를
권해 할 수 없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 같이 나누어
먹었다. 수박을 다 먹고 무심코 껍질을 버렸는데
기다리고 있었던지, 어린아이 몇명이 잽싸게
달려들어 주어서 먹어버렸다. 그걸 먹은 것을
후회했다.
사촌이 시장에서 일을 보는동안 잠시 동구밖에
나와 돌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20세정도
되는 청년이 걸어나왔다. 동구밖을 나온 청년이
잠시 두리번 거리더니 갑자기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두손으로 신발을 들고 맨발로 걸어가는
것도 보았다. 집에는 넝쿨호박을 많이 심었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줄기와 넝쿨잎을 먹기위해서
라고 했다. 또 그동안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피나무 껍질을 벗겨서 딱딱한 겉껍질은
버리고 속껍질을 갈아 옥수수 가루 한줌을 넣고
먹었다가 똥을 누지 못해 큰 고생을 했다는 말도
했다.
00살짜리 조카가 말했는데 금년 여름에만 한반
친구 3명이 허기를 달래려고 산에서 버섯을
따먹었다가 죽었다고 했다. 배가고파서 허기를
달래는 문제가 먼저여서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서 학교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매부는 00임에도 불구하고 다리통 굵기가
내 어깨굵기와 같았다. 식량문제로 모두 출근을
안하고 직장식당도 쌀이 없어서 6개월 전부터
문을 닫았다고 했다.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찾아와서 내일이 시어머니 돌아가신지지 3년인데
지금까지 차례를 못 지냈으니 쌀 한종지만
달라고 했다. 그런데 매부가 절대 안주었다.
그래서 내가 주라고 했는데도 계속해서
거절하면서 우리가족이 죽기 직전에서 10여집을
울면서 돌아다니며 옥수수 가루 한 사발이라도
달라고 애원했을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우리도 먼저 살아야 한다고 했다. 큰어머니는
일제시대에 각설이 질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단천에서 6째사촌이 왔는데 거기도 상황이 똑
같았다. 이번여름에 00살짜리 조카가 단천에 있는
이모네 집은 바닷가니 먹을거라도 있을거라
생각하고 여행증도 없이 몰래 차를 타고 갔다
왔다고 했다. 가다가 차에서 붙잡혀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자고, 풀려나 도착했더니 이모는
없고 이모부와 딸(0세) 둘만 있었다. 가느라
이틀을 굶었는데, 방 윗목에 강냉이 죽 한 사발이
있어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모부가 딸만 먹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우리 중국동포들 역시 생활이 어렵고 한번가면
적어도 임시통행증 500원(5만원)까지 포함해서
오고가는 경비까지 계산하면 최소 인민페 3천원(30만원)은
있어야 한다. 일반 중국조선족들은 돈 없어서 갈
수 없다. 친부모,형제나 있으면 찾아갈 수 있는
형펀이다. 이번에 다녀오느라 총 경비가 400불이
들었다. 세관규정에 쌀20키로 이상은 통관이
안되지만 200키로 까지는 눈 감아 주고 있는
형편이다.
미화 100불이 지금 북한화폐로 2만원이었는데, 93년도
이후에 나온 달러만 통용이 되었다. 이전것은
가짜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 해관(세관) 직원들이 너무 거만하고, 살찐
사람들은 그 사람들 뿐이었다. 세관 통과 규정은
옷은 팬티건 무엇이건 벌이 아니라 무조건 10개만
가능하고 헌 옷은 안되고 새옷만 가능, 술은 6병(6근)으로
제한 되어있고, 식량은 비교적 제한없이 가지고
갈 수 있지만 혼자서 지고 갈 수 있는 양의
한계가 있었서 많이 가지고 가기는 곤란하다.
북한에는 거의 교통이 안되고 걸어서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연변 친척방문
하겠다면 밀가루 1톤을 가져올 능력이 있는
사람만 통행증을 해준다고 한다. 이 경우
이들에게 1톤을 해 줄 수 있는 경제능력을 가진
조선족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또
중국쪽에서 1-2백키로는 봐주지만 1톤은 중국의
식량통관 규정상 봐주기가 어렵다는 점도 있다.
도문교회에서는 북한친지를 방문할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쌀200키로를 무상으로 주고
있는데, 이 교회의 장로중에 한분이 북한00에
친척이 있다. 이 분이 사정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가보니 정말 사정이 위급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분은 자기가 가지고 간 쌀을 각 마을
사람들에게 한 그릇씩 나눠주고 급히다시
돌아와서 친척들을 다 모아 쌀을 지고 다시
그곳을 방문하기를 여러차례, 이제 그들이
그곳을 방문하면 하나님이 쌀을 가지고 왔다고
소문이 난다고 한다 ; 96년 8월 00일-00일 사이 북한
회령지방을 방문한 연변 TV방송국 00000 00 000씨의
증언, 96년 10월 4일 오전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