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말 상황

< 기근정보 2 ; 96년 12월말 상황 >

자료수집 시기,장소 및 방법 : 97년 1월29-30일. 연길시 천주교회 지구에 주거하는 조선족(이00씨) 가정에서 탈북한 북한청년 3명을 직접 인터뷰함. 이틀동안 함께 먹고 자며 대화하는 형태로 이루어 졌고, 북한청년들은 수집자를 흑룡강성에 사는 중국조선족 동포로 인식하고 있음. 북한청년들에게 수집자는 복음전파와 함께 가족을 위한 식량구입비를 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과 접촉하는 수집자의 동기를 충분히 이해하였음. 기록일 : 97.2.4일. 수집자 : 통일강냉이 k

* 접촉 탈북청년 3명 신상명세

김0만 (남. 32세. 키 1미터 58센티정도) : 현재 평안남도 개천읍 거주, 00공업대학 수의학과 졸업, 군대에서 고급군관(한국계급으로 소령)제대, 노동당원, 아버지(현재 뇌졸증으로 누워있음)와 부인과 아들(4살)이 있음.

김 00 (남. 28세. 키 1미터 63센티정도) : 김0만씨와 이웃에 함께 거주, 대학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함. 성씨외에 이름 밝히기 원치않음. 결혼한지 3년되었으나 아이는 낳지 않음. 부인(27세.이번에 함께 동행함)과 부모 두분 모두 생존.



* 증언내용

이야기는 주로 김0만씨가 하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곁에서 확인하고 보조하는 형태였다. 김0만씨는 처음에는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술을 먹고 또 집에 식량으로 가져갈 돈을 주자 눈물을 흘리며 어쩔줄 몰라 했고 그 다음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도착한 후 북한특무들에게 붙잡힐까 무서워 한달동안 계속 방안에서 밥먹고 잠만 자왔다. 그래서 수집자가 늦은 밤에 연길시에 사는 조선족 몇명(공안원 친구가 있는 사람들)을 불러 호위하여 노래방과 양고기 뀀 집을 데리고 나갔다. 노래방(화면이 9개인 대형 모니터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는데 일반백성이 그런 문화를 누린다는 것이 자신의 상상을 초월했던지 가슴이 울렁거린다면 앉아서 일어서지를 못했다)과 양고기 뀀 집에서 대접을 받고 눈이 휘둥그레진 김0만씨는 그 자리에서 자기 이름과 노동당원인것 까지 밝혔다. 이야기 하는 것을 감안할때 그는 상당한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는 이틀동안 그는 아주 많은 시간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97년 2월 4일 연길을 출발 두만강변 화룡 로과 쪽으로 귀북함.

< 우리들은 96년 12월 30일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읍의 집을 떠나 8일 후 두만강 얼음을 건너 중국에 밀입국 하였다. 개천에서 청진까지 기차를 탔는데, 기차는 도중에 고장과 전기가 자주 끊겨 5일만에 청진에 도착했다. 기차의 유리창이 한장도 없어서 추위에 떨었고, 한루분의 식량(죽) 밖에 없어서 4일을 내리 굶다시피 했다. 정월 일일 설날에도 굶자니 마음이 슬펐다. 청진에서 중국 국경까지는 교통편이 전혀 없어서 3일을 걸었다. 도중에 무산에 있는 학창시절 축구부 후배집에 들렀는데, 그 집에 도착하자 마자
모두 굶은 허기 때문에 까무러 쳤다. 오후 2시경에 후배집에 도착했는데 그집 역시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도 후배 어머니가 아들 선배가 왔다며 멀건 죽같은 것을 한 사발 주어서 셋이서 나누어 먹었다. 그 집에 도착해 3시간 정도 쉰 후 저녁 5시경 다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저녁 어둠을 틈타 두만강 얼음을 타고 중국땅으로 월경하였다. 강을 건널때 초소를 만나서 우회하여 건넜다(이들이 건넌 곳은 중국쪽 지명 ‘남평’) 우리가 사는 개천군 1개군에서만 하루에 굶어죽는 사람만도 100명 정도 된다(이때 옆에 있던 축구선수 했던 김씨는 100명은 더 되고 200명은 될 거라고 말함. 이때 수집자가 하루에 100명은 너무 많은데 그건 한달을 잘못 이야기한 것 아니냐고 하자, 그렇지 않다. 분명히 하루에 그렇게 많이 죽는다고 재확인함. 이 부분에 대해서 이 후에도 재차 3회 정도 확인을 했는데 언제나 동일한 대답을 함). 금년은 작년보다 수해가 더 심하고 기근이 더 심해 인구절반이 굶어죽을 것이다. 어린아이도 기를 수 없어서 150원 정도에 (중국돈 15원, 한국돈 1500원)에 파는 경우도 많다. 기차타고 올때도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파를 것을 보았다. 아이를 사는 사람은 그래도 끼니는 때울 수 있는 군관들이다. 거리와 역전에는 먹을 것을 찾아서 부모없이 헤메는 어린아이들이 뼈만 아상한 채 떠돌아 다닌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체를 치울 관도 부족하다. 96년 8월 개천읍 다리밑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에서 장사하러 나온 여자였는데 뚱뚱한 사람이였다. 몸뚱이는 다 뜯어먹고 뼈와 머리통만 다리밑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범인은 잡혔다. 식량을 구해 보려고 모든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돌지만 희망이 전혀 없다. 공장의 관리자들은 공장의 기계부품을 다 뜯어다 팔아 식량을 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장은 큰공장, 작은공장 할것 없이 해체되다 시피 하였다. 가동되는 공장은 아예 없다. 나역시(축구한 김씨) 군용 대포 만드는 공장에 다녔는데, 우리 공장도 남은 부품이 없이 다 해체 되었고, 설사 공장에 출근 한다고 해도 월급을 주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한달 월급은 80원에서 120원정도 인데 그걸로는 쌀 1키로 그램도 사기 힘들다. 전력도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밤에는 암흑세상이다. 화력발전소의 직원들이 배가고파서 석탄을 퍼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원도 쪽은 93년도 부터 전기가 끊겼고, 김일성,정일 생일에만 하루동안 전기가 공급되었다. 요즘에는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왔다고 하면 1달에서 2달정도는 봐주기 때문에 돌아다닐 수 가 있다. 대부분 바다쪽에 가서 생선을 사다가 내륙쪽에서 파는식으로 장사를 하는 일을 많이 하는데 잘하면 한달에 쌀 2-3키로를 살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것도 쉽지가 않다. 돈이 있으면 빵이나 쌀을 사 먹을 수 있다. 물론 개인들이 빵2-3개를 구워다가 팔거나 쌀도 몇키로를 놓고 파는 형태다.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것을 허용하는 것은 이것을 붙들면 이것 마저도 시장에 돌지 않기 때문이다. 빵2-3개를 놓고 훔쳐가니까 그 위에 그물을 쳐놓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면 그물속에 손을 넣어서 한개를 빼서 파는 식이다. 북한내에서는 아무리 돌아다녀 봐야 양식을 구할 수 가 없을 것 같아 중국에서 양식을 구해 돌아갈 생각으로 집을 떠났다. 그런데 중국에 오니 위험이 도처에 사리고 있어서 오고 가지도 못하고 먼 친척집 방안에서 밥먹고 누워 있는 일 밖에 못하게 되었다. 처음 두만강을 건너 후 운이 좋아던지 문을 두드린 집 주인이 조선족 이었고 집안으로 빨리들여 숨겨주고 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연결로 연길까지 오게 되었다. 온지 한달이 되었는데, 갑자기 먹어 살이 쪄서 그런지 온 몸이 붓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밥을 굶고 있을 아내와 4살된 아들, 뇌졸증으로 누워계신 아버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인다. 일반 백성들은 모두 다 전쟁을 하자고 난리다. 어린아이와 노인들(특히 60대 이상노인들은 거의 다 죽었다고 한다.)이 제일 불쌍하고 많이 죽고 있지만, 간혹 살아계신 일제시대를 지낸 노인들은 일제시대에도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아다고 말을 하고, 또 백성이 나서서 전쟁
을 하자고 나라를 조른 시대는 없었다고 한탄한다.

북한에서는 고추 조차도 영글지 않는다(밥상에 오른 약4센티정도 되는 작은고추를 보며 눈이 둥그레졌다). 고추가 없어 김치도 담아 먹지 못한다. 배추도 자라지 않아 시래기 같은 배추싹을 뜯어 소금을 뿌려 먹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소금만은 부족하지 않다. 이번 가을(96년 10월) 개천읍의 한 아주머니가 산속의 땅을 몰래 개간한(정부허가 받지 않고 개인이 개간하면 벌금 물림)밭에서 옥수수를 얼마간 추수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안 한 청년이 밤에 그 집을 습격하여 어주머니를 죽이고 얼마 안되는 그것을 빼앗아 달아났다. 양식 1키로를 빼앗기 위해서도 살인이 벌어지고, 길에서 여자 혼자 머리위에 양식같이 보이는 보따리를 지고 가면 힘센 청년들이 그냥 밀치고 봇따리를 빼앗아 달아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형제끼리도 이웃끼리도 양식 한톨을 가지고 싸우기 일쑤고 생활이 전쟁처럼 되어버렸다. 나무껍질도 이미 다 벗겨먹고 학생들도 학교에 다니지 않고, 공인도 공장엘 나가지 않고 오직 양식 구하러 다니는 일에만 메달려 있다. 나도 93년 부터 배급이 끊어졌다. 배가 고파서 걸을 수 조차도 없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전쟁이 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고 굶어죽는 인민들 한테는 이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달러를 처음 보았다(돌아갈 양식을 구하라며 달러를 주자 신기해 한다, 그리고 잠시 충격과 감격에 휩싸여 멍해졌다. 처음에는 무슨 조건이 있는가 해서 두려워 했으나 돕는 이유는 한 동포이고 그리고 십자가가에 달리신 예수님 이야기를 해주자 안심을 하였다). 조국에서는 친 형제들끼리도 원수 지간처럼 되어 도울줄을 모르는데 우리는 중국에 와서 동포들을 만나면서, 이렇게도 한 핏줄이란 것이 소중한가 무어라 말할 수 조차 없다(목이 메였다). 우리가 제일 무서워 하는 사람은 첫째는 조국(북한) 사람이고, 두번째는 남한사람이다. 한번도 못 만나봤으니까. 세번째는 중국사람이다. 내 목에 극약을 달아 주시요. 솔직히 말해 나는 노동당원이지만 이제는 당신의 하나님을 믿을테니 만일 내가 당신의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면 그 약을 삼키겠오(진심으로 하는 말인것이 역력해 보였다). - 집에 돌아가 가족을 구한 후 다시 돌아와서 양식을 가져가 마을사람들을 구할 것을 제안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