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 상황


< 기근정보 7 ; 97년 5월 상황 >

수집시기.장소.방법 : 97년 5월 10일-5월 23일, 북한탈출식량난민 6명 인터뷰, 북한방문 조선족 2명 인터뷰, 북한과 무역차 매일 북한을 오가는 조선족 무역상 2명 인터뷰, 통일강냉이 식량전달차 북에 다녀온 2명 인터뷰, 두만강변 개산툰과 백금지역 방문기. 기록일 97년 5월27일. 수집자 ; 통일강냉이 k.

* 수집자 주 ; 기근정보 6의 1) '어머니 업고 두만강 건넌 청진 청년'으로 소개되었던 그 청년의 어머니가 어젯 밤(5월 27일) 흑룡강성 00처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화가 왔다. 오늘 중(28일)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영양실조에 시달리다 갑자기 영양주사를 맞고 음식을 잘 먹자 생기가 나는 듯 했으나, 신체 속 내장은 예전에 다 파괴된 상태였었다고 한다. "먹고 싶은 것 원 없이 먹어 봤으니 이젠 죽어도 소원이 없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이제 소원을 다 이루고 새 세상으로 가셨다.

 

1) 홍00(여,34세,함북 길주군 일신탄광), 박00(여,30,황해도 개성시)씨 증언

* 수집자 주 : 5월 12일 오후 1시 연길시 00처에서 굶주림을 피해 탈출해온 위 두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4월21일 두만강 상류00지점에서 중국땅으로 월경하였다. 홍씨가 일신탄광을 떠난 날은 97년 2월 27일이고, 박씨가 개성을 떠난날은 3월 1일 이었다. 홍씨와 박씨는 무산엮에서 꽃제비 생활을 함께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까지 동행자가 되었다. 홍씨와 박씨는 각각 2월 28일, 3월 10일 부터 중국도착 하루전인 4월 20일 까지 2개월 동안 무산역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5섯명의 북한처녀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도착 후 5섯 사람을 거쳐 매매되었다. 이들이 수집자와 만나게 된 것은 중국 도착 후 20여일이 되었을 때다. 박씨는 한국으로 부인이 도망가 버린 한 조선족('이도백하' 지역에 사는)집으로 팔려갔고, 홍씨는 박씨가 팔려간 같은 마을에 사는 성불구자(XX가 심하게 작은)에게 팔렸다. 홍씨는 밤에 잠을 자다가 남편이 징그럽다고 박씨 집으로 도망을 왔고,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서 몸마저 움직이기 힘들었던 박씨는 남편에게 한달간만 부부생활을 참아달라고 양해를 구해 승락을 받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 홍씨와 박씨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던 북한처녀밀매자들이 박씨 남편에게 박씨에 대한 값을 더 지불하라며 협박을 해왔다. 결국 박씨를 샀던 남편이 돈을 더 지불하지 못하자, 이들 두 여인은 밀매자들에게 다시 붙들려 연길로 오게 되었다.

이들은 산동성으로 다시 팔려가기로 예약되어 대기중이었는데, 수집자 팀에 제보가 들어와 이들을 구출하고, 밀매자들은 공안당국에 신고되어 체포되었다. 수집자와 이들 두 여인은 12일간(5월12-5월23일) 함께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동안 파라티푸스로 20여일째 고열로 시달리고 있던 홍씨와 심한 영양실조로 걸음조차 걷기 힘든 박씨에게 약과 영양주사를 투여하였다. 이들은 건강하게 회복되어 박씨는 다시 남편(처음 팔렸을ㄸ 만난 남편이 너무 신사적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에게 흠뻑 반해 있었는데..)을 만났고, 홍씨는 두만강 00지점에서 5월 24일 밤 수집자가 돈으로 제공한 1톤의 양식을 들고 다시 북으로 귀향하였다. 홍씨는 무산역전에서 남자들에게 몸을 팔아 겨우 목숨을 연명했는데, 몸값은 북한돈 100원(한화 340원)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홍씨가 몸팔아서 준 돈으로 사탕을 사오라 심부름을 시키면, 열 알을 사오다가 너무 배가고파 못 참고 도중에서 4알을 먹어버리기도 했다며 비감했던 기억을 회상한다. 홍씨의 7개월된 딸아이 '지운하'가 무산역에서 3월 16일 굶주림을 못견디고 숨졌는데, 역전을 자주 드나들던 할머니가 시신을 데려다 공중화장실에 버렸다고 한다.

우리 겨레의 슬픈 운명은 언제 끝이 날런지 그들의 고통과 운명을 함께 질 수 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들의 말대로 "전쟁보다 더 참혹한 세월"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홍00씨 증언 요약 ; 함북 길주 일신탄광에서 왔습니다. 제가 사는 탄광촌은 700세대에 총인구 2800여명 됩니다. 탄광에 출근하는 사람은 1400명 입니다. 길주를 떠나던 97년 2월 27일 당시 탄광에 출근하는 사람은 전체 일꾼의 40%도 되지 못했습니다. 출근자들도 츨근만 겨우 했지 맥이 없어 갱에 들어가서 잠만 잡네다. 모두 굶고 맥이 없어서 형편 없시요. 매일 3-4명이 굶어 죽어 나갑니다. 우리 탄광에서는 작년(96년) 12월 부터 굶어 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배가고파 집을 떠났는데, 어디로 가도 먹을게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 무산역에 도착(2월 28일)해서 4월 20일 까지 두달어간 살았는데, 들어봤는지 모르겠어요. 꽃제비 라고... 꽃제비 생활 했시요. 지내 배 고파서 형편없단 말입니다. 3월16일날 저희 운하가 죽었어요. 7개월 짜리 딸 아인데 젖이 통 나오질 않아서.., (아기에게 먹일 분유나 우유는 없어요? 라는 질문에)그런게 어데 있습네까? 그저 물도 없어서 먹이기가 힘들단 말입니다. 맹물도 한병에 5원씩 받고 파는데, 우리같은 것들은 거냥 어데가서 물 조차 얻어먹기 바쁘단 말입니다. 역안에서 먹고 잤는데 먹지 못해 누워있고, 조끄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득 하단 말입네다. 그냥 앉아 있다 누워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거란 말입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열 사람은 된다 말입니다. 무산역 안에서 내 눈앞에서 굶어 죽은 사람만 그렇단 말입니다. 8명은 남자고 두명은 여잔데 우리 운하 그중 한명입니다. 죄다 50살 아래 젊은 것들이란 말입니다. 우리 길주는 그래도 조금 나은 형편입니다. 작년까지는 그래도 견딜3만 했는데, 올해들어 부쩍 더 어렵단 말입니다. 총살도 요즘에는 쎄게 시킨단 말입니다. 길주에 있을때도 자꾸 총살했는데, 목매달고 또 총으로 한 열방씩 쏘아서 죽인단 말입니다. 공터나 운동장에다 사람을 모다놓고 공개적으로 죽인단 말입니다. 하도 배가고프니 무얼 훔치거나 양식을 뺏을려고 사람을 죽이고 또 소를 잡아 먹거나 하는 일이 많단 말입니다. (아니 소를 잡아 먹었다고 사형을 시켜요? 라고 묻자) 그럼요, 우리 조선에서는 소 한마리와 사람목숨과 바꿉네다. 사람이 없어졌으면 찾지 않지만 제 집의 개가 없어 졌다고 하면 얼마나 찾는데... 정말 소 한마리가 사람보다 더 값이 있습니다.

(남조선 사람 어때요?. 무섭습니까? 라고 묻자) 우리는 정말 무섭게 생각했단 말입니다. 머리에 뿔나고, 그런 것처럼 교육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남조선에서 날마다 전쟁하자고 하는 줄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만나보니 다 좋은 사람인 것 알았습니다(북으로 건너가기전 '남쪽 사람들이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통일을 하기 원한다는 것을 이웃들에게 알려주세요'라고 말하자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며 눈물을 글썽이며 두손을 합장해 작별인사를 하였다).

 

박00씨 증언 ; 그러니까, 4월21일날 두만강을 건넜시요. 저는 워떻게 제가 두만강을 건넜는지도 잘 모르겠시요. 무산역에서 거저 배가 고파서 죽기 직전이었는데, 내가 아는 할매가 '너 저쪽 동네에 가면 잇밥에 고깃국을 먹여줄께'하는 것 아니겠시요?. 그렇다는데 더 무슨 이유가 있어야지요. 그때당시 정말 오랫동안 먹지 못해서 몸이 땅으로 쫙 가라앉는데 자꾸 졸음만 오고 그랬시요. 2먹을것 준다는 말에 정신없이 따라나섰습니다. 할머니 따라 우리와 같이 온 여자가 5섯명 이었는데 다 처녀들 이야요. 나와 홍씨를 빼고 2명은 무산 여자고 한명은 평북도 아가씨 였어요. 그냥 할머니 따라가다 보니 밤 12시나 되었는데, 막 산으로 데려가더란 말이예요. 조금 가니까 '엎드려' 그러는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냥 한참 엎드려 있었는데 어찌나 춥던지 거기서 그냥 잠들면 죽고 마는 거지요. 또 한참을 기다렸더니 할머니가 '자 이제 건너라!'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보니 떡 두만강 같더란 말입니다. 내가 '할머니 이것 두만강 아닌가요?' 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야 잔소리 말고 빨리 건너라'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가 맨 나중에 건넜는데 내 몸이 어찌나 가볍던지 발이 땅에 닿지도 못하고 물에 몸이 둥둥떠서 계속 떠내려 갔어요. 한참 가다 보니 강 반대쪽에 가 있더라구요. 먼저 건너간 치들이 붙잡아 주어서 겨우 땅으로 올라왔어요. 무산역에서 출발할 때부터 나는 겨우 걸음을 걸었는데, 그저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조금 걷다가 또 한참 쉬었다가 하느라고 맨 뒤에 쳐져서 겨우 따라왔지요. 강을 건넌다음 미리 약속한 집으로 할머니가 우리를 다 데리고 가는데, 나는 더이상 힘이 없어서 갈 수 없었어요. 혼자 산속에서 불 피워 놓고 옆에 누워 잤지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정말 오래 굶다보니 아마 제 정신이 아니었던가 봐요. 아침이 되었는데 밤에 같이 온 아가씨 하고 할머니가 밥 한덩어리 가지고 왔지 뭐예요. 고걸 그냥 먹고는 걸어서 나도 그 집으로 갔어요.

중국에 와서 5섯 사람을 거쳤단 말이예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가 우리를 팔았더란 말이예요. 처음에 안도(백두산 밑 산동네) 저 골짜기에서 온 아저씨가 우리를 데리고 갔단 말예요. 홍씨랑 둘이 한 마을에 갔는데, 우리 아저씨는 사람이 영 실하고 좋겠 생겼지요. 딸이 11살 짜리가 하나 있는데, 각시는 연길에서 한국사람과 눈 맞아서 한국으로 돈 벌겠다고 달아나 버렸다고 해요. 근데, 아저씨가 내게 어찌나 잘해 주던지 영양실조 걸려서 형편없는 날 살릴려고 날마다 약하고 음식을 갖다 먹이고 했어요. 관계도 한달간은 참아달라고 했지요. 아저씨와 손가락 까지 걸었어요. 약속을 잘 지켜 주었어요. 그런데 한 10일쯤 되었을때 우리를 아저씨에게 넘긴 사람들이 와서 우리 아저씨를 협박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하더니, 결국은 우리를 붙들어 다시 연길로 데리고 나왔어요. 처음 연길에 왔을때 작은 방에다 우리 다섯을 가둬놓고 밖에서 열쇠를 채우고 가더란 말이야요. 방 안에다는 요만한(일반 여름이불) 얇은 이불하나만 주고, 그래서 얼마나 춥고 겁이 났는지 다섯이서 그저 오들 오들 떨었지요. 그때 홍씨는 파리티푸스 열이 20일째 40도가 넘게 났고, 나도 영양실조로 맥 못추고 시름 시름 누워만 있었지요.

나는 원래 함경북도 연사에 시집을 와서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죽었지요. 식량이 하도 바빠서 개성에 있는 친청집엘 갔어요. 친청에는 계모가 계신데, 도와주지를 않아요. 조선에서는 친형제끼리도 먹는것 가지고 싸우는게 많지요. 그러니 계모가 도와 줄리 없겠지요. 3월초 개성을 떠나는 기차를 탔어요. 기차에도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탈 수가 없어서, 담배하고 술을 사가지고 창가에서 막 흔들었지요. 그랬더니 남자들이 손을 뻗혀서 올려주어 창문으로 탔습니다. 앉지도 못하고 무산까지 오는동안 거의 계속 서다시피 하고 왔어요. 무산까지는 10일이 걸렸는데 그동안 계모가 만들어준 옥수수떡 2끼분을 가지고 ㅁ일 조금씩 뜯어먹고 왔습니다. 열차 안에는 굶는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은 노래를 불러서 음식을 구걸하고, 노인들은 넘어지면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사람이 밑에 있어도 그 위로 막 밟고 지나가는데 정말 형편없습니다. 오다가 황해도 황주에 있는 동생집에 들려는데, 그 당시에 바로 옆마을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자기 애를 잡아서 삶아먹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 아주머니가 일주일을 굶었답니다. 방안에 앉아 있는데 솥단지 옆에서 강아지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해요.

사실은 자기 아이가 솥단지 옆에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너무 굶다보니 정신착란이 일어난 거지요. 아주머니가 빨래방치로 머리를 쳐서 죽이고는 가마솥에다 물을 붙고 끓였다고 해요. 한참 끓이는데 고기삶는 냄새가 나서 반장이 무엇을 얻어먹을까 해서 와서 물었더니, 개를 삶는다고 하더래요. 근데, 쌀이 없다며 500g을 반장댁에서 꿔줬 답니다. 한참있다가 아주머니가 반장댁에 고기국을 떠왔는데, 국 속에 아기 손톱이 들어 있었다고 해요. 물론 그때 까지도 아주머니는 제 정신이 아니었답니다. 반장이 신고를 해서 안전부에서 와서 붙잡아 갔습니다. 이것은 내가 실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일어난 일이니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수집자가 믿을 수 없다고 했더니.. 이외에도 지나가는 손님을 죽여서 젖담은 사람을 안전부에서 체포한 또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증언함) 무산역에 도착하니까. 몸이 완전히 뼈 밖에 남지 않게 되어 더랬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못 먹어도 물이라도 잘 마시면 되는데, 맹물도 5원씩 받고 판단 말이예요. 몸이 수분을 받지 못하니까 금방 살이 다 빠져 버리더란 말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무산역에서 꽃제비가 되었어요. 10일동안 4끼를 먹은적도 있고... 그것도 고마운 사람이 지나가며 5원짜리 하나는 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돈을 가지고 얼음과자를 몇개사다 팔아서 남은 돈으로 국수를 한 그릇 사 먹었단 말입니다. 정말 사람들이 쎄게 죽어나갑니다. 야!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지독한 것은, 우리는 날마다 무산역에서 잔단 말입니다. 그런데 내 옆 의자에 앉아있던 여잔데 나이는 마흔세살 먹었는데 20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버티다 죽었어요. 그 여자를 보며 나는 인간이 정말 지독하다고 느꼈습니다. 안전부 야들이 와서 끌고 가는데, 다리를 한쪽씩 잡고 머리는 땅에 질질 끌고 가는데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내가 무산역을 떠날때 역안에만 누워있는 사람들이 한 20명은 되었는데 지금쯤(중국온지 20일이 지난 시점임)은 아마 다 죽었을 겁니다(홍씨와 함께 대화하며 '영도'도 죽었겠지? 하며 서로 물어본다. 홍씨 대답은 '이미 죽고 말고, 다들 죽었다야!' 라며 단호히 대답하였다). 나도 그곳에 이틀만 더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홍씨 아이 운하 굶어죽을때도 봤어요. 그 아이는 눈망울이 얼마나 예쁜지 또릿 또릿한 눈이 점차 흐려졌어요. 내 손가락을 입 주위에다 가져다 대면 손가락을 먹을려고 고개를 연속 따라 돌리는게 기가 찼어요. 엄마 젖은 안나오고, 먹일게 없어서 맹물을 떠다 먹이고, 간혹 국수 한 줄을 얻어다 주면 정신없이 빨고 했는데 3월 16일날 죽었어요. 운하 엄마는 나중엔 몸을 팔았는데, 한번에 100원(한국돈340원해당)씩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사탕 10알을 사오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나는 사오는 도중에 배고파서 못 참고 4알을 먹어버리고 했습니다.

전인구의 20%는 간부고 나머지 80%는 백성이예요. 백성들 생활은 다 마찬가지 예요. 배급이 안 나오니까, 먹을게 없어 가족도 다 헤어집니다. 집 팔고 가마 솥 까지 다 팔아서 먹고 나면, 헤어질때는 아이들을 데려다 역전에 버리고 부인과 남편도 서로에게 입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서 헤어집니다. 신혼부부도 혼인을 하고는 먹을게 없으니 나중에 양식이 풀리면 만나자고 헤어집니다. 군인들도 영양실조로 눈이 멀거나 하는 사람이 많은데, 군대에서도 책임을 져주지 못하니까 집으로 돌려보낸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군대내에도 허약자 영양실조자들만을 수용하는 동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짜. '올해는 간부만 살고 백성은 다 죽고 개가 찰떡을 물고 다니는 해(인민이 다 죽고 나면 쌀을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나중에는 개가 찰떡을 물고다닐 거라는 의미임)'라고들 합니다.

< 이하 부분은 요약만 되어있고, 구체적으로 푸는 작업은 내일중 작업완료 예정>

 

2) 함북명천탄광 소식(부부증언. 둘다 34세)

* 수집자주 ; 97년 45월 16 삼봉지역 국경을 넘어 탈북함.

부부증언 ; '전쟁하면 전 인민의 40%가 죽고, 전쟁하지 않으면 전 인민의 60%가 죽는다'는 소문이 크게 났습니다. 정말 전쟁이라도 나서 무언가 돌파구가 생겨야 합니다. 명천탄광은 약 1600세대 종업원 3,700명으로 지역전체 인구는 약 6천명정도 됩니다. 그동안 5백명 굶어 죽었고 2월3일 그곳을 떠날 당시 매일 4명정도씩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탄광출근율 10%미만 굶주림으로 힘이없4어 출근 못하고 각조에 1명씩이나 겨우나와 경비서다가 돌아가는 형8편. 탄광 지배인이 강조하는 구호는 '죽지만 말고 살아 남아라'라고 이웃집 일가족 6명 다 굶어 죽어가던 이야기, 옆에서 이야기 하던 사람 꼬구라져 죽는 이야기, 무덤팔 힘이 없어 대충 땅을 파고 묻어서 비 한번 오면 시체가 드러난다고, 의사들 처방은 '미음한술 먹이면 낫겠는데...', 20%간부는 세끼를 먹고 80%는 다 마찬가지, 명천에서 삼봉까지 오는 도중 세천에서는 하루에 60명씩 굶어죽어 나갔다는 소식들었다. 김책시에서도 작년 6월 하루 60명이상 굶어죽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곱절은 더 어럽다. 정말 몇명이나 살아남겠는지..

하루 100리 길을 걸어서, 술 빚어 바닷가에 가져다 팔고 바닷가에서 이면수 사다 팔아 연명, 함2북 명천 길주는 비교적 잘 사는 지역이라고, 식량O아 떠도는 여행객들 전 마을 인구 90% 이상, 화교들의 상술(쌀과 기타양식 생필품을 가져다가 팔아, 돈만 있으면 이들에게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어, 화교나 중국인 친척 있는 집은 그래도 먹을 것이 있어 이런 집을 골라서 강도행각 하는 사2람들이 늘어나서 중국에 친척있다고 소문난 집 사람들은 죽는 일이 많다고..), 3년간 배급량 5개2월분밖에 작년부터는 일체 중단 자체해결지시 더욱 곤란.

풀독 느릅나무,피나무 껍질 분쇄해 먹고 분쇄되지 않은 가시 몸속에 쌓여 죽는 사람도, 사람들이 북쪽 국경선쪽으로 엄청나게 몰려있다.

.안전부는 안전하게, 보위부는 보이지 않게, 당간부는 당당하게, 노백성은 노골적으로 해먹는다.

3) 무산방문하고 온 조선족 강00씨 증언 ; 무산역 맞은편 무산읍 43반 한00씨 가족과 그 이웃 세가족 16명중 12명 아사 4명만 생존중(52월4일현재), 무산 어린이구호소 금년 2월 100명 수용되어 있었는데 5월3일현재 70명사망 30명만 생존, 5월18일 함북도 무산변경 두만강상류 호곡에서 3명의 북한처녀 익사시체 목격 굶주림 피해 탈출하다가 힘없어 익사한 듯, 연사소식 이불덮고 방에 누워있다는 가족들 소식.

4) 조교 간부 000씨증언 - 회령시 관짜는 집 소식(1일 70여명 사망설 작년 7월), 김정숙동상앞에서 8기아로 쓰러진 여인, 군인들의 뜨거운 감자알 약탈, 동생김철호 이야기 5일 굶고 평양서 남양까지 도착, 아이들 사탕준 이야기, 전쟁미 바닥났다는 소식(84년 남한수재 곡물, 평양축전때 이미 군량2미 지출하여 대부분 소모 되었다고 ,제일 조총련 의장 한덕수씨가 속았다는 소식), 황장엽으로 인해 죽은 무수한 사람들 이야기

5) 국경선소식(남양, 삼봉,회령교두소식) - 000씨(하루 2번씩 북조선 왕래하는 조선족 무역상, 열차한칸에서 굶어 죽어서 내려뜨린 시체가 27명, 평남 개천서 출발한 열차 함북 남양까지 도착하는 9일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직접시체를 내려 떨군 북한사람으로 부터 직접 증언청취. 황잡엽 망명 2,3일후 도착한 열차에서), 교두에 나와 6개월 3개월씩 기약없이 중국의 친척대기하다 굶어죽기도...

00국,00희씨(00000 양식전달 팀-) 5월 20일 남양에서 기다리는 사람 숫자 대충 세어보았는데 1200백여명 대기 중, 북 전국각지서 오다, 역전에 쪼그려 있고, 누워있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고, 어린이들도 많이 보였다. 친척 기다리다 굶어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소식. 세천탄광은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나가서 아예 페광했다는 소식이 들려옴. 삼봉교두도 1일 1백명, 회령 150-200명선 대기자 가득. 이들이 건네주는 쪽지를 중국의 친척에게 전달해 주는 일을 해주는 고마운 사람들 있으나, 정작 친척들은 이들에게 가져갈 양식살 돈이 없어서 애태우며, 어떤 사람들은 괜히 쪽지를 가져 온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고..

6) 기타(000, 00시 무역국장, 리00씨, 00시 관리 방북자 - 북한군 이동소식, 북한군 00처에서 근무하는 대령이 식량구하러 나왔다가 하고 간 증언 '7월8일 김일성 기념관(금수산 궁전) 헌납 제사를 2드리고 남한을 친다'는 계획으로 '중조변경의 군대를 서서히 빼내 휴전선으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것, '이동 이미 시작되었다'며 '나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며 걱정하더라는 후문. 김일성 3년상까지는 참겠다는 일반백성들의 정서가 있고, 또 최근 탈북한 식량난민 중에서 북한정부가 '7월 8일이 지나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 증언하고 있고, 이들역시 7월8일 이후 전쟁난다는 증언을 하고 있음. 이런 분위기와 관련 북한에 자주 드나드는 조선족 정부관리나 무역상들은 '칼가는 소리가 쓱쓱 들려온다', '화약냄새가 진동한다.'는 표현으로 북한의 전쟁의지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증언. 전쟁막기 위해서 남한에서 빨리 대규모 식량지원 해야 한다며 남쪽의 어리석음을 강하게 성토... 한개마을이 굶주림으로 전멸한 곳도 있다고. 함북연사에서 탈출한 두 노인과 아들 손자의 증언은 5년 동안 배급받지 못했다고. 중앙은 요 몇년 못 받았겠지만 함북도 등 북부지방은 10년간 계속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그리고 이젠 최악, 절망뿐, 국제단체 식량 들어왔다는 소문 들리지만 도무지 구경조차 할 수 없다고...

 

** 전체 자료 분석 요약 - 아사자 숫자, 일반적 사회현상, 전쟁가능성, 지원물량의 의미

북한전역 현재 대기근 진행중으로 확신. 작년 초부터 대량 아사자 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 일부 사정이 나은 지역은 조금 늦게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전지역 동일한 상황 전개 됨. 굶주림으로 1개군 적어도 최소 일일 50명 사망은 확신, 많게는 150-200명까지 추정가능, 그동안 이미 300백만명은 아사했을 가능성 크게 존재. 북한 인구가 2천만명이 채 되지 못한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떠돌고 있다. 1일 1개군 아사자 수 50명기준 일때는 200개군 10여개시(?) 월 35만명 이상 아사 추정. 150명기준일때 월1백만명 아사 추정 가능. 이는 2월 조선일보(금년 중 1천만명 아사 예측)와 , 3월 중 미국 토니홀 의원(금년 중 7백만명 아사 예측) 주장과 맞아 떨어질 개연성 있다.

남한정부와 언론은 96년 11월부터 97년 6월까지 북한에 지원된 식량지원 물량과 예약된 것 까지 2포함 54만톤으로 집계하고 북한이 7,8월 고비를 넘길거라고 예측하는데, 이는 사악한 예측임. 순전히 북한정권의 붕괴냐 아니냐는 시각에서의 예측일 뿐임을 상기해야 한다. 북한정권이 7.8월을 넘기고 버티더라도 북한내에서 죽어갈 겨레의 생명은 무수할 것임. 정권붕괴 시각보다 북한인민이 기근으로 인해 죽는 사람의 숫자에 대한 예측과 대안이 먼저 앞서야 할 것임. 북한에 1일 총 소요되는 식량 량이 1만2,3천톤으로 볼때 이 기간동안 제공되거나 앞으로 제공 될 물량은 10여년간, 특히 근 3년간 최고의 기아선상에 놓인 사람들에게 목숨도 지탱하지 못할 양일 뿐임. 매일 수천톤씩 들어가도 들어가는 순간에 먹어치우기에도 부족한 물량임. 따라서 일시에 최저 1백 50만톤 이상의 양식이 제공되지 않는 한 북한은 자체 재생산 능력을 갖출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임.

 

 

대기근이 휩쓰는 북녘 - '무산의 위대한 영웅'

(외국인노동자 피난처 김재오 전도사)

<원죄의 땅 >

 

비틀, 비츨 발 걸음이 헛 딛인다

현기증과 어지러움, 눈동자에 불이 인다

온 세상의 생물들이 음식으로 보인다

 

신촌,강남,화량리 거리엔

기름진 음식들, 술과 포도주 잔치가 열리고

거리엔 비틀,비틀 구역질 소리

찌꺼기가 쌓였다

 

굶주림과 사치의 향연

원죄가 내려쓰는 땅

한반도!

 

탐욕이 흐르는 땅에서

神의 진노가 광풍같이 일었구나

 

혈육이 제일 두려운 세대여

연약한 백성들끼리 서로 서로 눈을 감고

식용으로 전락한 아이들과 살찐 처녀들

빈궁한 단칸 골방에서 진흙떡을 먹으며

흐느끼는 구나

 

십자가가 내려왔구나

골고다의 십자가가

다시 다시 이땅에 일었구나

지도에 갇힌 불쌍한 인민들

가여운 인민들을 보고

주께서 우시는 구나

 

주의 십자가를 따라 나도 가련다

십자가를 끌고,

고난의 인민의 땅을 쓸러 가련다

인민이 주체되고 수령이 비주체가 되는

예수의 새 하늘 새 땅을

일구러 가련다.

 

(97년 2월 2일 평안도 개천에서 식량을

구하러 중국으로 넘어온 조선청년 세명을 만난 후 느낀 감상)

 

 

<'조선의 가장 위대한 영웅'>

그는 요즘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였다. 연길시 한 집에 숨어있는 그를 만난것은 97년 6월 4일 밤이었다. 어린나이 임에도 그가 내 보이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어른이 보이는 것보다 한층 더했다. 날카로운 눈매는 함경도 사람 특유의 강인함을 보이고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듣자 마자 남쪽에서 온 사람임을 직감한 듯 경계의 눈매는 한층 더 빛을 더해 갔다.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장군님..." 하며 훈련된 수사를 계속 내뱉는 그가 안쓰러웠다. 사실 그가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신경을 심히 자극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굶주림에 지쳤지만 조국을 탈출했음으로 인해 갖는 '조국을 배반한 죄'에 대한 후과를 두려워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실제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 이라고 했다. 그는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소년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이었다. 키 1미터 50센티, 하지만 그의 키는 60명인 자기학급에서 딱 중간에 해당한다고 했다. 북조선에서 양식을 구하러 국경을 월경해온 사람들이 나를 만나고 나면, 처음에는 의례 남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 자체때문에 받는 심적 타격(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는 말을 내뱉 듯 그도 꼭 같았다. 그는 처음 만나 두려운 나를 껴안고 하루밤을 잤다.그리고 나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올해 4월 17일 부터 5월 29일 사이에 두만강을 건너 네 차례나 중국과 조선을 오고 갔습니다. 한번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상식량을 구하러 왔고, 두세번째는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들어갔고, 이번에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굶어죽기 일보직전의 이웃들을 안내하여 건너왔습니다. 강가에서 중국땅을 응시하며 해가 지면 건너기로 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배고파 참을 수 없었어요. 애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훤한 오후 4시쯤이었는데 그냥 강을 건넜어요.

아버지는 무산광산에 출근했는데 작년 4월 00일 돌아 가셨어요. 형이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태어나서 한번도 밥을 양껏 먹여보지 못했다며 아버지는 가슴 아파 하였어요. 그리고 광산식당으로 형을 데리고 다니며 아버지 몫으로 나오는 죽을 먹였어요. 그 후 아버지는 굶어서 죽었습니다. 96년도 중반기쯤엔가 무산광산에서 인구조사를 했는데, 광산에 탄 캐러 출근하는 세대주들만 굶어죽은 사람들이 3천명 이었어요. 무산광산에 소속되어 있는 전체 인구가 3만명쯤 되는데... 아마도 가족들까지 합하면 얼마나 죽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 마을만 해도 200가구 정도 되는데 제가 집을 떠나던 금년 4월 중순경 마을 전체세대 중 절반이 이미 집을 비워서 폐허가 된 상태였습니다. 대개는 죽거나 식량을 여행을 떠나 유랑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같은 학년이 원래는 네학급 160명 이었는데, 올해는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40명 밖에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고등중학생이라 조금 참을성이 있다고 하지만, 초급인민학교 어린애들은 배고픈 것을 견딜 수 없으니 학교나오는 숫자야 뻔 하지요.

아버지가 죽고 난 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형과 나 역시 목숨보존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나도 결국은 꽃제비가 되어 한 일주일 무산역과 양강도 대흥단 쪽을 전전했습니다. 길거리에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길가에 사람이 쓰러져 있으면 발로 툭툭 건드렸다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 사람 죽었구만'하고 지나갑니다. 무산역 앞에 답사려관이 어린이 구호소 인데, 이곳에 숱하게 많은 어린이들이 수용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먹지 못해 굶어죽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방문을 열어보면 한 방에 수십명씩 앉아서 눈동자만 나온 채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어요. 그 중에 보면 많은 아이들 얼굴과 몸에 이가 하얗게 서려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죽는다는 표시입니다. 죽기전에 이도 더이상 빨아먹을 피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디다."

나는 그에게 진정한 수령은 바로 너의 아버지라고 말해주었다. 네가 너의 가정에서 인민이었을때 너의 아버지는 가정의 주체인 인민(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영웅', '조선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그 소년의 얼굴에서 자유와 해방감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97년 5월 북한 기근소식>

5월말에 내가 접한 북한에 대한 소식은 이 보다 더 끔찍한 것들이 많았다. 무산읍 00반에 사는 한00씨 댁과 그 앞뒤집에 사는 가족들은 총 열여섯명이었는데, 이들중 지난 5월 4일 현재까지 열두명이 굶어 죽어 네명만이 살아남아 있다는 소식, 무산역 어린이 구호소에 금년 2월 수용된 어린이가 100명 이었는데, 이중 70명이 아사했다는 소식, 5월 17일 두만강 상류 도곡에서 세명의 젊은(15,17,40세가량) 북한여성이 양식을 구하러 강을 건너다 익사해 물에 떠서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 화룡현 00벌에서 조선족 부자가 북한에서 양식구하러 건너온 여성 열네명을 모두 강간하고 한 명씩 팔았다가 공안당국에 붙잡혔다는 소식, 함경북도 연사읍 00촌 방안에서 이불을 덮고 죽음을 대기하는 몇가족에 대한 소식과 이미 굶어죽은 사람들에 대한 소식, 평안도 개천에서 함북도 남양까지 오는 기차가 9일만에 도착했는데 이 기차에 타고왔던 한 북조선 사람은 자기가 탄 열차 한 칸에서만 자기손으로 굶어죽은 시신 스물일곱을 열차밖으로 내던졌다고 증언, 5월17일 회령시 강녘 공터에서 9명 총살집행 했는데 처형죄목은 모두 소를 잡아먹었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모두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었다는 죄목이었다는 소식, 중조국경해관인 남양.회령삼합.온성군삼봉.무산칠성리 등에는 북한 전역에서 보통 5일씩 굶고 도착한 후 중국에서 양식가지고 혹시 올지도 모를 친척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백명에서 수천명씩 대기중. 이들중 기다리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은데 몇일전(6월7일)에는 북한군대가 이들을 강제로 데려가 모내기를 시키고 있다는 소식, 회령역안에서 굶어죽어 있는 사람들 많고 죽기를 대기하며 줄지어 벽에 기대있는 사람들 많다. 5월26일 역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한 사람은 시체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구토를 심하게 했다고 증언, 청진시는 회령보다 상황이 훨씬더 심각한데 거리에서 죽은시체를 달구지와 트럭 몇대로 수거하고 있는데 다 치우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소식. 굶어죽어서 한 마을이 사라진 경우

도 있다는 소식을 전한 북한방문다녀온 용정시 000공무원, 이 소식들은 5월말과 6월초에 대체로 북에서 온 북한인들 만나 직접들은 내용들이고 일부는 북한에 다녀온 조선족들에게서 들은 소식이다.

 

<"전쟁하면 전 인민의 40%가 죽고, 전쟁하지 않으면 전인민의 60%가 죽는다. 전쟁만이 살길이다".>

지난해(96년) 8월 우연히, 북한에 있는 큰아버지댁을 다녀온 한 조선족 언론인을 만난 이후, 나는 북한의 식량문제가 앞으로의 대기근을 예고하는 서방언론과 국내언론들의 태도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 북한의 굶주림 소식을 지나가는 말로 들려준 첫번째 증언자였지만, 나는 그의 말이 만일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수치스럽고도 심각한 시간에 놓여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일종의 의무감때문에 확인작업을 시작했지만 얼마 못가 나는 참혹한 북한 사람들의 실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에 대한 책임감이 나를 눌러왔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만강가에서 북한에 식량을 보낼 궁리를 하며 몇달을 서성거렸다. 이때부터 양식을 구하러 국경을 넘어온 북조선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내며 지냈다. 내가 만난사람들은 평안도 개천, 황해도 사리원과 개성시, 양강도 혜산, 함경도 무산.회령.세천탄광.온성.길주일신탄광.명천탄광.청진,경성 등...북한 전역에서 온 이들로, 지금까지 대략 40여명에 달한다. 어떤 사람은 노동당 당원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차역에서 꽃제비를 하다 굶주려 죽기직전에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에서 만난 이들도 있었다. 이들과 하루 또는 보름간씩 함께 지내며 치료와 위로를 나누었고, 이들은 나의 권고에 따라 대게 량식을 구해 다시 조국(이들이 북한을 부르는 명칭)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각기 자기가 사는 지역에 대한 사실들만 증언했지만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96년말 또는 97년 2월 이전까지 적어도 북한전체 인구중 10%(2백30만명)가 굶주림으로 인해 사망했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올해 상황은 작년보다 훨씬 심각해서 1개군에서 1일 최소 40명 많게는 150명정도가 굶어죽고 있는것 같다..(금년 2월 조선일보의 한 기사는 올해 북한주민 1천만명 아사를 예측했고, 미국의 토니홀 의원은 3월 7백만명 아사를 예측했다)한달에 최소 40만명 이상이 굶어죽는 셈이다. 국내외 언론에서는 하루 1백그램의 양식이 공급된다는 둥, 96년 11월에서 97년 10월까지 북한에 들어갈 양식이 75만톤(예정된것 포함)이 되어 올해 춘궁기를 넘길 수 있다느니 하지만,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은 보통 3년에서 5년(함북도 등 북부지방)동안 배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증언했다. 어느나라가 양식을 지원했다는 소리를 방송을 통해서 듣지만 자신들에게 지원된 예는 한번도 없다고 하였다. 국내외 언론보도와는 달리 북한 내부의 대기근은 앞으로 더욱 더 처참한 양상으로 진행될 것 같다. 이는 북한주민이 필요로 하는 절대량의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 북한주민들에게 필요로 하는 1일 필요식량은 1만2천톤 가량되는데, 그동안 국제원조나 북한이 자체조달한 식량의 양은 식량이 북한 전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소모되고 말 조금씩만 전달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남한에서 민간차원으로 벌어지는 식량모금 운동조차도 겨우 5만톤을 모으는데 그쳤는데, 남한 사회의 요란함에 비하여 그 양은 실제로 북한동포들의 4일간의 식량밖에 되지 못한다. 수년간의 굶주림으로 이미 죽음으로 갔거나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적어도 지속적으로 영양을 보충하여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재생해 줄 정도의 식량이 될려면 최소 1백50만톤에서 200만톤의 식량이 일시적으로 북한으로 들어가지 안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내외 언론들이 북한의 내부 체제개혁이 없으면 양식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지금시점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너무나 정치문제화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악하다. 진정으로 북한의 장기적인 소생을 염려한다면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는 2천만의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즘 북한 전역에서 유행하는 이 말들은 북한인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전쟁하면 전 인민의 40%가 죽고, 전쟁하지 않으면 전인민의 60%가 죽는다. 전쟁만이 살길이다". "올해는 간부(전체인구20%)만 살아남고 백성은 다 죽고, 개가 찰떡을 물고 다니는 해다". "조선은 2년후면 식량문제가 없어진다(인민이 다 죽고 없어지면 양식먹을 사람이 없어져서 저절로 식량문제 해결된다는 뜻)" 이것은 북한사회가 식량문제의 최후 해결책을 전쟁으로 보고 있음을 뜻한다. 사실 그동안 북한정권이 수십년동안 전쟁준비를 빌미로 인민을 조여왔지만, 그것은 통치수단의 방법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전쟁열기는 인민들이 자신들의 최악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생물학적 요구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위험한 것이다.

 

< 포위된 학살 >

북한주민들은 지금 사실상 5가지 세력에 포위되어 학살당하고 있다. 남한정부와 공조하고 있는 미국,일본정부의 외교업적과 정치협상의 논리에 포위되어 있고, 내부적으로는 북한정권의 정권안보와 자존심, 또 중국정부에 의해 체제이탈시 사냥감이 되어 송환되어 처형됨으로써 식량난민 조차도 될 수 없는 세계역사상 가장 불행한 희생자들이 되어있다. 이들을 포위망에서 풀어낼 해법은 큰 차원에서 보면 두가지 일 수 밖에 없다. 하나는 인도주의에 의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조성하여 남한정부와 미국정부가 정치협상의 논리를 포기하고 대규모 식량원조를 하게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가지 방법은 남북한간의 극심한 긴장의 고조를 통해서 남한과 미국정부가 손익계산을 하게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사실상 전쟁으로 까지 치닫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민족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인민들의 경우, 현재 죽음과 함께 앉아있는 상황에서 전쟁은 최악이기 보다 최악에서의 변화를 가능케하는 '희망'의 상징일 수 있다는 점은 민족적 비극이다. 북한정권은 50년간 계속해온 스스로의 모순을 변화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정권운명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변화는 아예 기대할 수 없다는 전제를 인식해야 한다. 미국에는 올해 쌀만 1천5백만톤, 일본은 4백만톤이 잉여농산물로 버릴처지에 놓여있다. 중국은 무역흑자가 100억불, 남한은 1천억불이 넘는 수출국임을 상기해야 한다. 북한 전인민의 생명은 그중 단 5억불에 달려있는 셈이다.

 

<교회는 남북한 정부의 생명경시 논리와 거룩한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기근으로 인한 북한인민의 대량의 죽음은 우리민족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 심판에서 남한교회는 이미 때를 놓쳤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생명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천억원이 넘는 교회건물을 짓고, 안락한 건물에서 예배의식과 사치를 행하면서, 불쌍한 그들을 위해 우리들의 푼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드릴 뿐이다. 단 몇개의 교회건물을 팔아도 살릴 수 있었을 수백만명의 생명들에 대한 피의 값, 죽음의 값을 하나님께서는 김정일에게 묻지 않으실 것이다. 바로 우리들에게 물으실 것이다. 늦은 이때를 만회하지 못하면, 민족과 열방이 탐욕으로 부패할때 기근과 전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민족에게 임할 것이다. 민족과 교회의 운명이 일각에 달렸으니 교회여 회개하고 네 재물과 재능을 팔아 흑암중에 있는 북녘동포를 구원하자. 이 세상정부가 제도화한 법에 예속된 신앙이 아니라 이 세상국가와 정부를 초월하신 지존자 하나님의 신앙의 이름으로 생명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남북한 정부에 대하여 교회는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자. 지금 당장 조건없이 가장 빨리, 굶주리고 헐벗은 내 형제들에게 빵이되고 옷이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