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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초창기 천주교도 조상 제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1601년 중국 선교를 시작한 마태오 리치는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 위에 복음을
적응시키는, 그래서 중국의 제사 제도를 인정하는 선교 방법을 채택하였었다.
그러나 후에 로마 교황청에서는 다른 선교사들의 진정서를 통하여 마태오
리치의 포용 정책인 조상 제사문제는 유교적 조상 숭배로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서 용납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개신교, 구교의 추종자인가 개척자인가 1884년 선교사 알렌을 통해 처음 전파된 한국 개신교 역시 조상 숭배 절대 불가의 입장을 고수했다. 선교사들은 제사가 단순한 예나 효가 아닌 조상을 숭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하였다. 그들은 전통적 기복 신앙과 조상 숭배가 모종의 함수 관계를 갖고 있으며, 조상을 잘 섬겨야 후손이 잘 된다는 민간 신앙이 조상제사의 저변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것을 간파했다. 그 결과 한국 땅에서는 복음의 진리가 상당히 위축되고 제사문제는 선교사들의 큰 고민거리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904년 중국의 중앙선교협의회가 조상숭배와 기독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제사 대신 추도식을 정착시켰고 한국에도 자연스럽게 자리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조상숭배 허용으로, 개신교에서는 추도식으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물론 현대의 선교는 그 나라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배경을 고려하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는 복음 위에 인간, 문화, 사회를 재조명할 때 비로소 참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고 참 전통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의 문화와 전통을 다 무시한 이원론적인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임할 때 변화를 얻어 새롭게 창조되는 미묘한 관계가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추도는 추도 그 자체로 끝나야 하며 예배로 이어질 수 없다. 추도라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추모, 부모님께서 은혜와 부모님의 평소에 끼치신 덕이나 여러 가지 면을 깊이 생각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들이 족장들의 신앙과 삶을 회고하며 자신들의 모습을 돌이켜 보았던 것처럼 주안에서 아름다운 미덕이다. 그러나 예배에 무조건 '가져다 붙이기식'의 작태는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개업예배니, 장례예배니, 그리고 추도예배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유교의 기독교적 승화보다는 인간의 처지와 문화의 전통성에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부딪혀 심판을 받고 변화를 받아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다 크고 중요한 많은 문제를 뒤로하고, 이미 관례화 되어 있는 작은 문제로 목숨을 걸고 다수에 대항하는 어리석음이 아닌가도 싶다. 하지만 제사와의 싸움에서 생명을 걸고, 이 문제를 양보하지 않으며 순교한 신앙의 선배들을 추도(?)해 본다면 결코 시시콜콜한 문제는 아닐듯 싶다. 글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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