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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3

 

 

 

 

 

 

■Sight

"경건의 시간"에 숨은 복병

내 맘대로식 Q.T(Quiet Time) 만연, 그 사례와 문제점



경건의 시간이나 묵상의 시간으로 불리는 Q.T. 대개의 경우는 모임을 인도하는 한 명의 리더(leader)를 두고, 일정 부분의 성경 본문을 읽기로 한다. 그리고 각자가 묵상한 내용을 자유롭게 나누게 된다. 형식은 비교적 자유로워서, Q.T 모임을 권하는 사람들은 모임이 '풍성'하다고들 이야기한다. 날마다 모임을 갖게 되고 인원도 여럿이다 보니 여러 가지 묵상의 내용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묵상의 내용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 자체로 '풍성'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관주의적 해석 가득, 풍성한(?) Q.T

다양한 내용들로 가득 메워지는 묵상의 시간. 그러나 내용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자기 상황에 맞추어 잘못 해석되는 일도 많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때문에 여기서 '풍성하게' 나눈다는 의미도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오늘의 Q.T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 쉽게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본의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우선 성경 본문 내용의 본 뜻과 다르게 성경을 자기 상황에 맞추어 받아들이는 위험성이 있다. 그 예로 앞 쪽(16∼17페이지)을 다시 펴 보자. 창세기 12장 10절 말씀에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르신 것은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택한 민족 이스라엘을 조성하려는 뜻이 있었다. 또 아브라함 개인적으로는 모든 연고지와 기득권을 포기하고 무조건 순종하여 낯선 땅으로 떠날 만큼의 신앙의 결단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 있듯이, 아브라함의 여정 또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나타내심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으며 하나님의 구원사역, 그 본래의 뜻이 강조되기보다는 젊은이들 각자의 사고 그대로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란 인간의 지혜 그 자체를 가지고 본받아야 한다느니 융통성 있는 크리스천이 되겠다느니. 혹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둥…. 말씀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자기 묵상을 하고 자기 고백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풍성하다'고 자랑하고 다양한 적용이 이뤄진다고 만족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풍성함이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성경 지식이 그다지 없는 대학생 개인에게도 문제가 있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Q.T 모임의 인도를 담당하는 자들에게 있다. 이는 리더의 자격이 대개 교회의 연장자격인 청년들에게만 의존되고 있기 때문. 성경 지식이 부족하고 바른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떠한 발언들이 나오더라도 올바른 지침을 주기 힘들다. 심지어는 본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라도 기발한 해석이나 독특한 관점에서의 발언이 오히려 주목받게 되는 일도 있다. 우리는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행위임을 깨달아야 한다.

 

무리한 적용, 탈피해야

Q.T 교재라 하면 흔히 그 마지막 부분에 '적용란'들이 있다. 적용란에는 그날의 성경 본문을 생활에 적용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이 있다. 적용란의 질문은 대체로 전날 지은 죄를 몇 가지 나열하고, 그것을 회개해야 하고, 오늘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절제함과 참음으로 해야겠다는 등의 다짐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적용들이 지극히 의도적이고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만약 그날 읽을 성경 말씀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핵심으로 한다면 그에 대해 인간이 구체적으로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굳이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눈에 보이는 행위로 나타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양, 그리고 자신의 낮아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할 것이다. 인간의 착한 행위나 거짓말하지 않는 행위, 우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의식 등의 적용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모습일 게다. 더 이상 어떤 행위로 연결시켜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서도 직접적인 적용을 유도해 내려 한다. 무리한 적용 관념은 오히려 개인으로 하여금 그 원래의 의미를 희석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안겨준다.

또한 이러한 적용은 묵상하는 자로 하여금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자신에게 익숙한 특정 구절(힘을 내야 한다는 등)에만 집착하게 하는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는 고단한 삶에서 힘이 되는 문구들도 많다. 그래서 액자에 담아 집안에 걸어두는 애용 구절도 많다. 그러나 이같은 구절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기 이전에, 이 구절이 어떤 문맥에서 나왔는지,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말인지를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구절만 가지고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말씀을 '부적화' 시키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Q.T 교재, 주체적인 수용 필요

한국 교회의 Q.T 생활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립시켜준 데는 Q.T 교재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일부 Q.T 교재는 순수한 말씀 묵상을 도와주는 역할에서 벗어난 것 같다.

일부 청소년 Q.T 교재들을 보면 성경구절들을 '짜집기'하는 편집 방식을 취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이 주의 주제를 '우정'이라고 정한다. 그리고 주제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예화 형식으로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그에 걸맞은 성경 구절 몇 개를 여기저기서 끌어다 나열한다. 이는 '적용' 이 강조되는 Q.T 분위기에 편승한 편집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아예 적용점들을 상위에 두고 성경구절들을 꿰어 맞춰 나열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구원을 선포하고 성화의 과정을 인도하려는 의도를 가진 성경 본문은 해체되기 마련이다. 묵상하는 자 또한 성경 본문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이 몇몇 인간들의 격언이나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고 있다. 성경구절이 모여서 그저 착하게 살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데 도움을 주는 격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선(善), 우정, 사랑 등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가치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기독교 가치관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의미하다.

'적용'이 강조되는 경향은 Q.T 교재를 만들고 Q.T를 생활화하는데 공헌한 이들에게서 더욱 강한 듯하다. '바른 Q.T'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가지는 이들 대부분의 주장이 '적용 없는 Q.T는 바른 Q.T가 아니다.'라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Q.T 교재가 그날의 성경 말씀을 이리저리 해석해 놓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묵상하는 자의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 중에는 잘못된 해석들, 즉 교재 집필진의 자의적인 해석을 실어놓는 때도 있기 때문. 그리고 묵상하는 사람이 말씀보다는, 눈에 얼른 들어오는 보암직한 예화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예화로 묵상(?)을 하는 기독인들에 대한 모임 인도자의 세심한 관심이 당장 필요하다.

 

신종 율법, 최신형 부적

오늘날의 Q.T는 일종의 '훈련화' 되어 있다. 때문에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Q.T를 하지 않으면 신앙이 의심될 만한 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 그 자체로 '쓸데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기독 청년들이 많다.

Q.T는 자발적으로 소망하는 자들이 이루어가는, 오히려 겸손한 모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모임에 참여한다거나 Q.T를 하는 것 자체로 신앙이 월등하다거나 하는 교만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이같은 생각으로 Q.T를 강요하거나 죄의식으로 지체를 얽매어서도 안될 일이다.

한편 Q.T하지 않은 날에는 왠지 다툼도 많은 것 같고 되는 일도 없다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모임에 나오면 뭔가를 재충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에는 외형적 훈련의 틀이 한 개인에게 안정적 틀이 되고 마는 경건주의적 맹점이 담겨있다. 개인으로 하여금 Q.T를 하면 안정이 되고 무슨 일이나 잘 풀릴 것 같다는 안도감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Q.T는 부적이 아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열심을 내거나 정성을 바치는 그 대가로 현세에 '보이는' 복을 주는 종교가 아니다. Q.T를 마치 하루 일과를 수월하게 해주는 부적인양 오해하는 이가 혹 우리 가운데 있는지.

 

성경, 제대로 읽는 비법 있나?

그러나 이 모든 위험성에도 불구, Q.T는 분명 '좋은' 것이다. 성경에서도 누누히 말하기를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사모하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인가? 이에 대해선 어떠한 방법도, 훈련 프로그램도 제시할 수 없다. 말씀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여시고 행사하시는 분, 말씀을 주관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적타락'한 인간들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임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읽어라', ' 저런 식으로 읽어야 은혜 받을 수 있다'는 등의 방법론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인간인 내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만큼의 은혜를 받아낼 수 있다는 식이다. 오래 전부터 외국인 누구누구의 묵상법이나 명상법들이 책이나 통신, 인터넷 등에 등장하여 인기를 끌어왔다. 살펴보면 호흡하는 데도 법도가 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오르는 주제들을 간파해야 하며, 오감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전부 사용하여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온 정신을 집중해야하는 것은 기본. 이외에도 가지가지의 방법론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같이 방법론들 상당 부분이 교회의 양육 프로그램이나 선교단체의 훈련 프로그램에 녹아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오류를 경계하라

언제부턴가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물을 능히 나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열심을 내면 하나님도 '반드시' 좋아하시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또한 그러한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 스스로 경건하다 여기는 이도 많다. 더군다나 그런 사고와 행위 아래서 얻어진 자기 성취감과 만족감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겉모습은 경건하고 깨끗해 보이나 실상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이는 은혜를 내리시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 한 분뿐임을 불인정 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이같은 자기 오류에 빠질까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이 같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될 것이다. 인본주의적인 사고가 만연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 쉽기 때문이다. 자기 근신의 눈으로 요즘의 Q.T를 돌아보자. 대학 캠퍼스나 교회 모임으로 이뤄지는 Q.T 모임에서, 이미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음을 곧 발견할 수 있다.

정설 편집장(pulitze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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