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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9

 

 

 

 

 

 

  

■연속기획

소외 남을 탓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할 것 그러나...


교회에 사람들이 옵니다. 남자(男子)와 여자(女子) 그리고 다르게 분류해 보면 어른과 아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금더 세분해서 구분해 보면 갓난아이, 유치원, 유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청년들 그리고 장년, 노년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분류해 볼까요? 고등학교 때부터 배운 미분·적분을 이용해 봅시다. 아마도 그 결과는 개인(個人)일 것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모래알이고 그룹(Group)은 낱개가 모여진 하나의 단체(單體)입니다. 하나님 아래서 모인 그룹을 우리는 교회라 부릅니다. 교회(敎會)란 '가르치고(敎) 모인다(會)'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알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분을 목사(牧師)라 부르고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을 성도(聖徒)라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교회는 많은 직분을 부여합니다. 현 기독교에서는 크게 집사, 장로, 권사로 나누어 교회 직분을 부여하고 봉사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사장님, 교사, 의사, 변호사, 검사(전부 '사'자 돌림이군요). 종류도 많고 다양한 인격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대부분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겠지만 더러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교회에 나옵니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인격들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지만 서로에 대한 갈등과 어려움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매일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네 과부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사도행전 6장 1절, 표준 새번역) 약 1900년 전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분쟁과 시기와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고충과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그리스 말하는 유대 사람이 히브리 말 하는 유대 사람에게 교회가 구제함에 있어 자기들 유대 과부에게 소홀했다는 이유로 불평을 터뜨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싸움이 왜 일어났는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부류는 같은 유대 사람이었지만 사용하는 말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이 다름으로 인하여 하나의 민족이 연합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말이 오고 갑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도 있고 받아들이가 어려운 말도 있습니다.

21세기가 4년 남았습니다. 21세기를 정보화 시대라 말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그것은 통신(通信)입니다. 통신에 있어서 서로간에 똑같은 규약과 똑같은 프로토콜(통신 전문용어)이 세워지지 않으면 쌍방향 간에 원활한 Communication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Communication을 자세히 살펴보면 'Com-'은 영어의 Vocabulary에서 'With Together'을 뜻합니다. '통하는 것'에는 '함께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그들의 말이 다름으로 인하여 함께 하지 못했었고 서로에 대해서 불평만 했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한 크리스천에게 있어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에서 불평, 불만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교회는 코이노니아(교제)를 중요시합니다. 올바른 코이노니아는 서로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게 합니다.

요즘 삐삐없는 젊은이가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호출번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인터넷 열풍은 곧 대부분 젊은이들에게 인터넷 ID(IDentity:신분)를 보급시킬 것입니다. 인터넷이 선풍적 인기를 받고 있는 이유는 집안에서 전세계의 모든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청소년들이 보아서는 안되는 음란, 퇴폐물이 인터넷을 통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PC(Personal Computer)로 들어옵니다. 잘못된 인터넷의 사용은 차라리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코이노니아도 그렇습니다. 올바른 코이노니아는 크리스천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만 잘못된 길로 가면 너무나 치명적입니다. 대학시절 한 선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태양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 뒤의 그림자는 짙어진다." 우리의 배타적(排他的) 모임이 잘 이루어지고, 우리가 웃고 기뻐할 때 그 밑바닥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온 것을 후회하고 이 곳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가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래서 형제, 자매하던 지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날 때 그것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교회에 남아 있는 크리스천? 밖으로 떠나버린 지체?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소외 당해 실족한 지체)에 대해 잘못이 없습니다. 둘째로 떠난 지체나 남아 있는 크리스천이나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로마서 3장 4절)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에 그분에게 잘못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찢어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소외'라는 말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 원인을 불신앙이나 죄의 결과로 온다고 합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지만 다른 지체들과 잘 융합되지 못하고 자기만의 울타리 속에 갇혀있는 분이 계신다면 남을 탓하기 보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봐야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장 10절) 우리가 서로에게 미움을 갖는 것은 바로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실한 관계성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그 순서를 무시하고 일을 뒤바꾸어 시작하면 그것은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것은 무너지고 부서지게 됩니다. 교회내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타지체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분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는가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비사교(非社交)를 '배신'이라는 단어로는 적절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경(호세야)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부정한 아내가 다른 사람과 간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셋째 내가 이웃과 친구들을 위해 얼마나 사랑했는가 반성해야 합니다. 자신이 소외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면 자신은 타인을 진정코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혹은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도구로 이용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주의를 자신의 모습 속에서 뿌리 뽑아야 합니다. 반대로 자기가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모임에 가입했은 때 그들의 독특성과 연합(聯合)성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모임의 결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며칠 안에 감당하려 하고 그렇지 못하면 마음 속으로 그들의 모임을 '집단이기적 모임'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끈기있고 침착하게 접근해야 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점진적으로 접근해가야 합니다.

교회는 소외당하는 지체들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과 사랑'... 12월 연말에 많이 듣던 표어 같습니다. 크리스천은 타인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끊임없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 새신자로 교회에 왔을 때 가졌던 관심과 사랑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곧 잊혀져 버립니다.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고 나야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14절, 표준 새번역)

과부 구제일 때문에 분쟁했던 초대교회는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들이 취했던 행동을 바라봅시다. "그래서 열 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사도행전 6장 2절, 표준 새번역) 교회가 분쟁하고 갈라지고 미워하고 쓰러져 갈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모두 불러 놓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몇 일동안 잘 나왔던 지체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신나게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할 때 구석에 앉아 있는 형제, 자매가 있다면 이곳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것에 크리스천은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1마리 양을 찾아 안절부절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처럼 지금도 구석에 앉아 슬퍼하고 있는 지체를 즐거운 코이노니아로 데리고 와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천 지체들끼리도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의 형상(形象)이기 때문입니다.


글 : 김형석(kwangju21@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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