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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5

 

 

 



 

  

■커버스토리


 


중추절이 되면 성도들 가운데 제사 지내는 가정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의 불안함 때문에 말씀으로 권면하며 기도하며, 그 어느 때 보다 긴장하는 때인 것 같다. 우리 주위에서 제사를 지내는 환경 가운데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결혼을 통하여 갑자기 제사 문제를 대하는 자매들 역시 많이 당황해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제사 문제는 아시아 기독인들이나 새로운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문제이다.

한국의 예속은 그 뿌리와 변천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주술적인 무속신앙과 풍수설과 불교사상과 유교사상 등이 혼합되었다. 고조선의 원시종교였던 무교에는 제사 풍습이 없었다. 무속에는 천신을 숭배하는 제천의 풍속이 있었을 뿐이다. 유교는 원래부터 내세도 구원도 영생도 없으며 본질적으로 현실중심적이다. 공자는 살아계신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도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세심하게 가르쳤지만 돌아가신 부모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사 지내는 풍속은 유교의 부모에 대한 도리와 무속적인 천신 제사와 기존해 있던 불교가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에는 제사 지내는 대상이 '귀신에게' 라고 나와있다.(고전 10:20) 중용에는 귀신의 덕은 위대한 것으로 말한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나 만물에 체재해서는 유외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제명성복하고 제사로 받아들이면 양양하게 상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니 시경에는 신의 내격함이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무심할 수 있으랴'고 하였다. 우리는 성서적 제사를 드려야만 한다. 성경에서 보면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점이다. 제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제사는 회개, 겸손, 의와 화해 그리고 거룩함이었다. 제사 문제의 타개책에 있어서는 타협과 공인 그리고 반대의 세 가지 입장으로 성립될 수 있다.

 

타협과 공인

635년경 당 시대에 전래된 경교(기독교한파)는 태종에 의하여 대환영을 받았으며, 선교사의 단장인 아라본(Alopen)은 진국대법죽이라는 높은 벼슬을 얻었고 교세는 얼마 안가서 전국 358주 도처에 예배당이 설 정도로 번창하였다. 경교는 왕치위본주의, 황제숭배주의, 부모효양주의의 삼대원칙을 내세워 충국애국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에게 굴종, 아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명분의 조상제사를 종교방식으로 채택하여 기독교 교리에서 탈선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말았다. 진리 자체에서 벗어날 때는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마침내 경교는 동양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또 한국에서 로마 카톨릭은 초기 조상제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 많은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초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사제도에 대하여 호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 한국사회에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이 이같은 타협을 했다고 해서 교회성장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우리도 개인적인 신앙에 있어서 제사 지내는 자리에 타협하기 위하여 절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시 16:4)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고통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생기게 된다. 제사와 예배를 혼합시켜서 하는 것도 바른 방법이 아니다. 또한 제사 음식을 만들 때 함께 도와주는 것까지도 합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형제들의 애경사에는 성실성의껏 돕고 새심한 부분까지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때 도둑질 하는 자리에 서있기만 하여도 공범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민 25:1-3, 겔 14:6, 요일 5:21, 행 15:29, 고전 10:28)

 

반대하는 입장

우리나라에는 개화 이래 장로교나 감리교 등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우리 땅에 상륙하였다.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고대의 전통의식과의 충돌로 적대적 대립의 상태로 된 것을 유념한 선교사단은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다.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정적 단계에 이르러 서슴치 않고 반대의 방안을 채택하였다.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한국교인들도 온갖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진리수호를 위하여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까닭에 한국 기독교는 흔들림없이 튼튼하게 건재하고 있음을 본다. 이같은 명확한 결정이 교회 성장을 방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복음전파에 박차를 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에도 전도인의 신앙의 상태만큼 개종인도 그 수준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추도예배

여러가지 문화상황에 처해있는 크리스천들은 복음이 문화에 따라 변질되지 않도록 그 문화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변화시켜야 한다. 문화는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해 변화되어야 한다. 제사문제에 있어서도 안 믿는 형제나 이웃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들의 습관을 변화시키며 그들과의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고전 9:19-23, 벧전 2:9이하) 추도예배를 드릴 때 가족이 먹기 위한 상은 좋지만 죽은 자를 위하여 상을 차리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리고 지방을 붙이거나 절을 해서도 안된다. 새로 예수 믿고 돌아온 가정에는 추도일이 돌아오면 교역자가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조상숭배를 하다가 갑자기 중단하면 조상이 저주를 내려 가정에 우화가 생길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안고 있기 쉽다. 그러므로 일주기 추도식은 교역자가 그 가족과 함께 진지하게 예배드리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이 좋다. 예수님을 오래 믿고 신앙이 제대로 잡힌 가정에서는 가장이 간단하게 자녀들과 친지들을 불러놓고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 예배 드린 후에 떠나신 분의 녹음된 육성을 듣든지 사진첩, 비디오에 담긴 모습을 보는 등 고인이 남긴 여러가지 은혜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며 신앙의 뿌리를 다시 한번 심는 기회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추도예배는 3년 정도만 드리고 더 계속할 경우에는 가족들이 의논해서 해야 한다. 또 혼성가족, 즉 반은 예수 믿고 반은 믿지 않는 가정에서는 한 쪽은 제사 지내려 하고 한 쪽은 안된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 내 신앙을 시험하려고 고의적으로 이 문제를 들고 나올 때는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순교를 당한 일도 있다. 그러나 불신 가족들이 악의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제사를 지내야 되겠다고 고집하면 인내를 갖고 일단 내버려 둬야 한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제사 행위에 동조하거나, 참여하거나 음식 만드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기독인들은 언제나 기독교 진리만이 영원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고 이 진리의 왜곡에는 절대로 굴종하거나 양보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글 : 김찬욱(새생명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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