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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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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임용섭 목사(광주 중앙교회 부목사)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해야될 삶의 원리를 제공해 주신 산상수훈이 기록되어 있는 장이다. 이 세상에서 갖는 성도의 존재의미와 본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이겠느냐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본문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먼저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소금은 아주 귀한 것이었다. 그때의 소금은 돈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소금만으로도 물건을 살 수 있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아예 봉급을 소금으로 받기도 했다고 한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빛'이라고 불러 주신 것만 해도 그렇다. 성경에 나와있는 '빛'은 종종 하나님을 지칭하거나 그분께 돌려드리는 말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우리에게도 '빛' 또는 '소금'이라고 지칭하신 것은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다. 그런데 소금과 빛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소금이 갖는 유익성에는, 첫째 방부제의 역할이 있다. 옛부터 소금은 부패를 억제하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비슷하게는 깨끗케 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 바로 소금이었다. 그 용도에 관한 예를 들면 치약이 없었던 시절, 소금으로 이빨을 닦아 깨끗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구약성경에도 소금의 이러한 역할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막 태어나면 아이의 몸에 소금을 묻히고 비벼서 깨끗케 했다. 그렇게 위생처리를 했던 것이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소제물을 드릴 때엔 소금을 치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이같이 깨끗하고 정결한 의식을 취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소금이 사용되었다.

둘째는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소금이 갖는 유익성은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중요성이다. 우리 인체는 염분의 섭취량이 줄어들면 근육의 경련이 일어나고 근육의 힘이 약해진다. 이것이 심하면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땀을 많이 흘리는 훈련을 한다던가 장거리 행군을 할 때에는 알약으로 만든 소금을 군인들에게 배급해준다.

누구나 알다시피 '빛' 역시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빛은 '생명'을 의미한다. 빛이 없으면 생물은 자라나거나, 존재하기조차 어렵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무(無)에서 천지를 만들어내실 때에 제일 처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생명이 있으라'라는 말과 같다.

밝음. 빛이 있어야 모든 사물들은 각각 제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또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빛이 없는 세상은 굉장히 위험하다. 빛이 없으면 넘어져 다칠 수 있고 모든 곳에서 다툼이 생겨날 것이다. 무지와 혼란이 생긴다.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범죄가 잦아진다. '어둡다'는 것의 이면엔 보다 큰 의미,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뜻이 있다. 때문에 이런 상태를 성경은 '어둠'이요 '빛이 없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빛은 또한 '기쁨'이다. 컴컴한 시골길을 가다 먼 데서 비치는 조그만 불빛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반갑고 고맙게 여겨지는지 모른다. 그만큼 빛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빛과 소금을 우리에 빗대시는 주님께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이러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책임과 사명이 얼마나 막중하고 큰가를 동시에 깨우쳐주기도 한다.

성도가 소금이라는 것은 성도가 있음으로 인해 이 사회의 부패가 방지되고 좀더 깨끗해져야 된다는 말이다. 외롭고 고단하고 서글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탈진하고 좌절하는 삶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아!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리스도인이 있기에 견딜만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책임이요 사명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우리 때문에 보다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 길을 앓고 방황하는 이 세대에게 삶의 목표를 정해주고 삶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희망과 소망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지하고 혼란한 이 사회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지혜로워지고 질서가 바로서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 비틀거리는 사회, 무기력한 사회, 붕괴되어 가는 사회, 반인륜적인 사회가 그리스도인 때문에 새 힘을 얻고 바로 서게 되며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해야 된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에 대해 빛, 소금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이 드러난다. 교회는 넒은 안목을 가지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깨우쳐야 한다. 그리하면 성도들의 눈이 뜨여져 정의가 무엇이고,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성경을 통해서 안목이 열리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도 열린다. 그때엔 스스로 나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된다.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득세하며 불신, 부패가 만연한 세계가, 복음으로 무장된 성도들로 인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찬 세계로 변해야 한다.

본문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다음 바로 뒤에 어떤 말씀이 이어지는가 살펴보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누가 언제 어디서 보아도 맑고 깨끗하게 드러나는 삶이어야 한다. 공명정대한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내 주위에 일어난 일들을 풀어 가는 데 있어서 나는 얼마나 유익한 존재였는가, 타인들에게 기쁨을 주었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언제나 불안과 긴장을 주는 것은 아닌가. 혹은 끊임없이 물의를 빚거나 불쾌감을 주고 있지는 않는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들의 결과가 우리에게만 미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께 그 욕이 고스란히 돌려지기 때문이다.

그 뒤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께서 우리를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것은 세상 사람, 즉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빛이 어둠과 다른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명 달라야할 것을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주일에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소금을 화학명으로는 염화 나트륨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물질은 그 구조가 아주 견고해서 외부에서 충격을 주어도 쉽게 깨어지지 않는 구조다. 이처럼 성도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것보다 쉽다. 성도이면서 성도가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렵다. 다시 말해 소금이 제 맛을 잃게 되는 것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단한 화합물질인 소금의 구조도 깨질 때가 있다. 그 때는 바로 오염될 때라고 한다. 다른 물질, 불순물과 섞일 때 소금은 오염되어 소금으로서의 제 맛을 잃어버리고 또한 해악물질로 변모하게 된다. 성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가 오히려 더욱 거세게 비난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욱 손가락질을 당하고 비난을 받는가.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없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눈물과 갈등,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성도답게 못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말이다. '난 왜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가' 이런 걱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가. 왜 돈이 안벌리는지에 대해, 왜 승진을 못하나, 혹은 다른 자녀는 다 대학을 가는데 왜 우리 애들은 대학을 못가나에 대해... 이런 걱정만 하고 있진 않는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실패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눈물을 짓고 몸부림치며 갈등하는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쓸데가 없다. 그런데 소금은 짠맛이다. 성도들이 그렇게 짠맛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다. 그는 예수를 믿는다고하여 죽도록 때려도, 감옥에 붙들려가도 여전하기만 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드디어는 포기해버릴 정도의 삶을 살았다. 우리가 우리의 직장에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주일날 놀고 싶어도 토요일날 놀러가게 만들만큼 세상사람들에게 짠맛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보루임을 사람들이 알게될 것이다. 어떻게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아야겠다.

소금과 빛은 아주 다르지만 공통적인 점이 있다. 첫째는 생명과 중요한 연관을 맺고 있음이요,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치를 띤다는 점이다. 만일 소금이 금고 속에 갇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금은 음식에 던지워져 자신을 녹이면서 맛을 낸다.

빛은 어떤가. 어둠 속에 자신을 내던져 자신을 태워야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다. 희생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없이, 어떻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겠는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채찍질 당한 것 같이, 내가 무시당하고 채찍당할 때에 그리스도가 전파됨을 알아야한다. 그때 우리는 얼마든지 무시당해도 좋고 깔보임을 당해도 좋다는 생각을 갖자. 그런 어려움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구원의 길로 들어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십자가를 당해도 좋다. 오히려 영적으로 신령한 유익이 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던저 다른 사람에게 큰 유익을 주고,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철저히 살아갈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야겠다.

 

본문말씀 : 마태복음 5장 13∼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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