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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7

 

 

 

 

 

 

  

커버논단Ⅲ




예수님이 가르치신 윤리(?)

그러면 예수님은 신자를 단지 윤리적인 고상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산상설교를 하셨는가? 그렇다면 석가나 공자 맹자와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어디 기독교에만 있는 말이던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을 예수님만 하셨는가? 공자도 했고 석가도 했다.

종교적 윤리의 이상은 사랑이다. 종교는 자애심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도덕생활의 규범과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웃의 생명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서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종교 안에서 기독교가 우리의 사랑만이 절대적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사랑의 내용이 전혀 다르지 않는데 어떻게 차별화를 둘 것인가? 결국 교회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계시적인 차원에서 보지 못하고 단지 윤리적인 차원으로 해석해버렸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인해서 공자나 석가와 다를 바가 없는 윤리가 교회에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지금 교회에서는 소위 기독교 윤리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윤리가 있다.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 세계에서 가르치는 윤리는 선한가? 악한가? 만약 세상의 윤리가 선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악하고 더럽다고 선언한 말씀에 위배된다. 세상에 있는 것이란 인간의 모든 정신과 사상, 윤리 도덕까지 다 포함하는 말이다. 때문에 세상의 윤리를 절대로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윤리가 선하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다. 단지 선한 윤리를 실천하면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윤리를 악하다고 할 것 같으면 분명히 산상설교는 세상 윤리와는 같아서는 안 된다. 세상 윤리가 악한 것인데 어떻게 산상설교가 세상 윤리와 같은 모습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는 산상설교를 단지 세상 윤리차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산상 설교를 인간의 악함을 고발하고 인간의 실체를 깨닫게 하는 계시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산상설교는 인간에게는 의가 전혀 있을 수 없음을 고발하는 율법의 역할을 하고 있다. 스스로 의를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악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신에게 의를 행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완벽한 죄인으로서 주님을 의지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계시하는 것이 산상 설교다.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는 말씀 앞에서 도대체 누가 윤리를 운운하겠는가? 그런데도 산상설교를 힘써 실천해야 할 신자의 덕목으로 가르쳐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창출해서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신앙을 윤리로 치장하려고 하고 신앙의 부족함도 윤리를 통해서 메우려고 한다. 거듭남의 모습도 윤리를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고 소위 성화라는 것도 윤리적 삶의 확대로 이해하며 경건의 모습 또한 윤리에서 찾으려고 한다. 윤리주의자인 마귀에 의해서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윤리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 신앙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인간 세계 안에 신앙 세계가 포함된 것이 아니다. 완전한 구별이고 단절이다. 따라서 인간 세계의 것이 신앙 세계로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하신다. 모두 더럽고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윤리가 선으로 가장해서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왜 윤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가?

교회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윤리와 도덕으로 잘 포장되어 있는 사회를 기대하고 교회가 거기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그들은 세상이 악해있는 이유를 인간의 비윤리적인 삶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이 윤리적인 삶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설사 완벽한 선한 세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이루어갈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윤리가 악을 저항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윤리가 악을 저항 할 수 있다면 세상은 분명 천국으로 점점 변해갔어야 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세계는 윤리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악은 전혀 달라진 바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윤리가 악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십자가는 죄를 이길 수 있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인데 윤리로서 죄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십자가를 믿으면 선한 삶을 살게 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죄인이라는 것은 죽었다는 선언이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죽은 자가 스스로 믿을 수는 없다. 외부의 힘에 의해서 믿음이 가능하다. 그래서 믿음을 은혜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들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믿음으로 살아났으니까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죽은 자이니까 선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믿음이 주어졌다면 당연히 선한 삶을 살아가면서 죄를 극복한 모습이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한 삶, 즉 온유하고 겸손하고 어려운 자들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교통 질서를 잘 지키는 등 윤리적인 선한 모습을 믿음의 증표로 여긴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자의 주장이다.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를 제공하신 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하신다. 인간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윤리가 선으로 가장해서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을 십자가 뒤에 감추어 버린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또한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만 알고자 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고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자, 즉 거듭난 자는 자기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고 은혜만을 앞세울 것이다. 은혜만 앞세운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말한다.

믿음은 행함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속에 불의가 없는 자는 보내신 이의 영광만 구한다(요 7:18). 자기 영광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영광만 구한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일하심이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고 성령을 받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능력이 주어지고 슈퍼맨이 되어서 윤리적인 삶이든 능력이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한 것이다.

이런 자들이 많이 애용하는 성구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궁핍하든 풍부하든 자족하는 것을 말한다(빌 4:11,12).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궁핍하든 풍부하든 물질에 매이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가? 만약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인간이 윤리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자신의 환경이 어떠하든 원망과 불평 없이 주님으로 만족하고 사는 삶만큼 고차원적인 윤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이지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능성을 다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모습이다.

인간은 영원히 죄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윤리로서 죄의 그림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것은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앞세운다. 자존심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벌컥 화를 낸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와 종교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보겠다고 설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은혜로 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다. 내면에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가치와 우월성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은혜로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 말 한마디까지도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위장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윤리란 인간의 가능성을 앞세우는 교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윤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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