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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7

 

 

 

 

 

 

  

커버논단Ⅳ




이상 세계 건설은 우리 능력 밖의 일

종교인들이 윤리를 통해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심판이다. 세상의 보존은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다(벧후 3:7). 심판과 멸망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계신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시는가?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일하시지 결코 고상하고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는다. 우린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파견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서 택함 받은 나라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죽음과 생명으로 나누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거하시고자 하신다(출 12:!3). 결국 이스라엘은 윤리와 도덕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서 세상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다.

요 3: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세상의 변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땅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의 택함 받은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시지 않는다. 요 17:9절의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는 말씀이 분명히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을 드러냄으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의 심판을 외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에는 차별화가 일어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능력의 말씀으로 들려지기 때문이다(고전 1:18). 육체의 소욕을 죽이기를 원하는 십자가 앞에서 진짜와 가짜가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 됨은 십자가이지 결코 윤리의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를 교회다운 모습, 신자다운 모습으로 주장한다면 그 윤리는 분명히 교회에서만 보여져야 한다. 참된 교회의 모습이 불교에서는 보여질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 사랑은 교회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불교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서는 보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기독교외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 교회가 윤리적인 예수를 가르치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흔히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변화시킨다는 것인가. 아름다운 세상으로?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찬 세상으로? 교회가 사랑을 베풀고 덕을 보이면 세상이 하나님을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랑과 덕이 하나님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왜 예수님 때는 온 세상이 총체적으로 복음을 거부했는가? 주님의 사랑이 부족해서인가? 주님이 덕이 없어서인가?

사실 예수님은 윤리적 감정에 파묻힌 인간이 상상하는 사랑과 덕을 내세워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다. 선지자 사도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예수, 선지자, 사도들에게서 훌륭한 인품과 덕목을 떠올리겠지만 성경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종교인들은 목사를 윤리의 대표자로 여긴다. 목사는 또한 최대한 인품과 덕목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무장해서 민중들의 신임을 받고자 한다. 십자가, 복음은 관심 밖이다. 오히려 십자가 지신 주님은 교회에서 몰아내고 훌륭한 인품을 소유한 윤리가인 예수를 내세운다. 고매한 인품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존경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민중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목사의 인품과 윤리, 또는 신자들의 윤리와 덕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는 말씀에 위배된다(요 14:26). 성령의 활동은 독자적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윤리가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결국 은혜를 바라보지 못하고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고 있는 불신앙에 불과하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조력자, 협력자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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