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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잘하는 병원에서는 몇백 만원을 호가한다는 쌍꺼풀 수술.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혹은 취업을 위해 호감가는 인상이 필요해서 남녀를 불문하고 유행하였던 우리의 '쌍꺼풀 수술'은 앞서 간다는 일본에게는 어쩌면 놀라울 것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유행이라는 이름 하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한국의 유교관념은 저만큼 물러가 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유행의 흐름을 꿰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를 해소해 줄, 믿을 만한 선생님은 다름 아닌 대중 매체일게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잡지나 TV에서 보이는 유행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름 있는 간행물, 그리고 TV나 다른 매체에서 다루는, 화장법과 패션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는 전문가의 견해라 여겨진다. 그러므로 유행에 대한 욕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정보들을 의심 없이 달게 받아들이게 한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신의 스타일이 돋보일 수 있는 확고한 지침으로 대중매체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유행을 따라잡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같은 연유로 우리는 매체가 인간에게 미치는 강력한 영향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갈수록 넘쳐나는 원색적인 광고 문구와 영상, 포스터. 악은 여러 매체를 이용하여 어린 청년들의 잠재의식 속에 그릇된 성의식을 심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교회가 준비했던 실제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대안은 얼마나 되는가. 아무런 기준이 없는 까닭에 '남들도 다 그러니까' 라는 대중성을 의지하는 젊은이들을 조심스럽게 돌아봐야 한다.
1위 바지와 티셔츠 이같은 결과는 잡지사의 편집부를 퍽 황당하게 했다고 한다. 그들은 요즘 세태에 섹시해 보이는 쫄티와 미니 스커트가 당연히 1위일 거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지와 티셔츠를 고른 남성들의 답변들은 편집부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깨끗해 보이고 건강해 보여서 좋다."나 "신선해 보이고 밝은 느낌이다." 라는 답변 외에도 "그냥 청바지나 티 셔츠라도 입기에 따라 섹시해 보인다. 꽉 끼는 티셔츠에 히프의 볼륨이 잘 살아나는 바지... 섹시하다!" 등의 질문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섹시한 것을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고 섹시하다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여자들도 부쩍 늘어난 모양이다. 여성미의 표현으로서 '참하다', '정숙하다' 등의 단어는 이젠 조금은 진부해 보이고 퇴색되어 버린 것인가. 그에 비해 '섹시(sexy)'란 단어는 더 이상 한국 여성들의 얼굴을 붉히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 여성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칭찬이 되어버린 인상이다.
"여성들의 배꼽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얼마전 기자의 눈에 띈 PC 통신의 토론 주제였다. 질문에 대해 여전히 많은 질책과 혹평들이 있었지만 흥미로운 점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이 어디있냐며 따분해하는 사람부터 시작하여 보기에 즐거우면 그만이라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길에서 배꼽티를 입은 젊은 여성이 경범죄 운운해서 법정에까지 출두했던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그즈음 배꼽티 논쟁이 얼마나 뜨거웠던가를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배꼽티에 대해 그만큼 부정적이었던 시민 의식도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교회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기 위해선 대단한 용기를 가져야 했다. 당시 사회의 눈초리가 미니 스커트에 대해서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거리의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옛날처럼 아슬아슬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예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노출 문화가 판을 치는 지금,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이런 모습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미니 스커트」 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몇 년 후 여름엔 배꼽티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그 때가 되면 예배당의 이곳 저곳에서 짧은 배꼽티가 얼마나 많아질까? 이같은 이야기들은 단순히 배꼽티의 유행과 세상의 노출 문화만을 언급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상업적 욕심과 타락으로 인해 범람케 된 노출 문화와 성 문물들은 유행이라는 멋진 이름을 달고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그저 한국 특유의 보수적인 성개념만을 보루 삼기엔 우리의 문화와 인식, 사고가 악적인 요소에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침범 당해 버렸는가를 심각하게 깨달아야 한다. 교회와 기독인들이 고민해야 할 때다. 하나님 중심보다는 「나」를 더 드러내는 세상을 염려하고 대책을 간구해야 한다. 글 : 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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