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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논단

이글은 '96남도지역 IVF여름수련회'책자에 나온 글입니다. 필자인 지성근 목사님(부산경남지방회 대표간사)과의 합의하에 싣습니다.


우리는 왜 매학기 수련회를 여는가? 왜 우리는 어렵사리 모으고 미리 준비모임을 가지며 춥고 더운 환경속에서 견디며 수련회를 진행하는가? 수련회는 우리에게 있어 무엇인가? 수련회를 어떻게 맞아야 하나?


수련회에 대한 회의주의

때로 어린 시절부터 교회생활 등을 통하여 각종(?) 수련회를 이미 많이 경험한 1,2학년 지체들에게서 우리는 심각한 냉소의 한마디를 듣게 된다. "수련회란 게 다 그런 거지요." 이 말 속에는 비수와 같은 의미가 숨어 있다. "습관처럼 참여했던 수련회가 나를 변화시킨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수련회 안에서나 혹은 수련회 직후에 가졌던 감정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오래가지는 않던 걸요. 그러니 이제 수련회라면 가고 싶지가 않아요. 수련회는 내게 있어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 같아요." 언제나처럼 무서운 냉소주의는 주변을 잠식해 가는 위력이 있다.

IVF에 들어와서 각종 수련회와 훈련을 통해 제법 훈련된 3,4학년 지체들의 고민이다. "여름, 겨울 두 번에 걸친 수련회와 그외의 각종 훈련을 충분히(?) 받은 지금 나는 상당히 바쁘다. 그동안 노느라고 보충해야 할 학점도 만만치 않고, 다른 친구들은 미래를 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데 매년 비슷한 내용의 수련회에 참여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까?" 내가 얻을 것이라고는 없는 그런 모임에 참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식의 실용주의는 오늘도 세련된 Senior 들의 마음에 또아리를 트는 것 같다.


수련회 신학

이런 저런 수련회에 대한 회의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수련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수련회를 사모하고 수련회에 참석하고 수련회 이후를 잘 살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탐구작업을 수련회 신학이라고 하자. 수련회 신학을 위해 우리는 성경신학적인 탐구를 먼저 해 보고 임상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일생의 이유를 생각하면서 수련회에 임하는 태도를 재고해 보자.


수련회-하나님 백성들의 언약갱신의 자리

수련회란 말을 영어로 옮기면 CONFER- ENCE 정도가 될 것이다. 이말의 사전적 의미는 '회의', 혹은 '모임'이다. 우리의 수련회는 각 지역에서 혹은 각 학교에서 흩어져 사역하던 동역자들이 모이는 모임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캠퍼스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cf.약1:1)로 인식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발견한다. 이것이 우리의 수련회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개념은 아무래도 출애굽 이후에 두드러진 개념이다. 모세 이전까지만 한더라도 구속사가 개인적인 루트를 타고 내려왔지만 이제 출애굽의 사건과 더불어 구속사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진행되어 진다.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에 기초한 언약이지만 언약 당사자로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를 신실하게 맺어갈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 아는대로 출애굽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 속에서 신실하지 못한 모습으로 서게 된다. 중보자인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백성의 공동체를 성결케 하시는 일을 하시고 나서 다시금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었다. (물론 이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출 19장부터 34장까지를 보라) 이런 Confer- ence가 오늘 우리의 수련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 34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인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보여야 했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워낙 하나님의 백성들이 망각하기를 잘 하며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주 그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 모일 필요에 대하여 언급하셨던 것이다.

여호수아를 중보로 한 하나님과의 언약(수1장 1절-9절)은 여리고성을 침략한 이후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새로운 갱신이 필요하였다(수7:11-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공동체의 성결의식과 아이와의 전투가 치루어진 후 여호수아와 하나님의 백성 모든 이스라엘은 에발산에서 다시금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는데 이 장면은 여호수아 8장 30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인상적인 장면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절반은 그리심산에 세우고 절반은 에발산에 세운후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서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라는 말씀이다. 아이 어른 남녀 노소 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말씀을 가운데 두고 모인 것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수련회-언약갱신을 위한 conference-를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읽으면서 발견하게 된다. 바벨론 포로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가 중심이 되어 무너진 예루살렘성을 수축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성수축이 마쳐지자 곧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갱신하는 신앙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느헤미야 8장에서 10장에 걸쳐 기록된 이 사건은 오늘 우리의 수련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8장에서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여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낭독하고 해석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회개와 기쁨이 그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초막적의 회복이 있었다. 9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동체적인 회개와 성결에 몰두한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한다는 표로 인을 치는 인상적인 장면이 10장에 나온다. 이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도덕과 경제와 사회가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위치가 교회-지역교회건 아니면 보다 포괄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건 간에-로 옮겨지게 된다. 신약의 성도들도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만큼이나 언약관계에 신실하지 못하고 언약관계를 잘 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주 자신의 공동체를 성결케하며 말씀으로 언약관계를 상기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적극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성령강림 이후의 예루살렘교회가 이런 모임을 가졌으며 그 이후 교회 역사 속에서 이런 종류의 모임-즉 수련회-이 계속되어 왔다. 성경에 나타난 수련회의 공통점은 1) 개인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초점이 있다는 것과 2) 언약관계에 충실치 못한 과거에 대한 분명한 회개를 통해 공동체를 확실하게 성결케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 3)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이 항상 중심에 있었다는 것 4) 그리고 일회적이라기보다는 정기적으로 이런 언약의 갱신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련회-영적 Realism(현실주의)의 자리

지난 수련회나 훈련에서 얼마나 우리가 열정적으로 헌신을 고백하였는가를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우습기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수련회에 대해 회의하거나 냉소하도록 두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현실이다라는 것을 먼저 인식하자. 이렇게 우리의 헌신과 결단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약에 불충실한 우리들을 너무나 잘아시는 하나님 앞에 언약을 갱신하는 자리로 함께 나가야 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더욱 자주 수련회를 가져야 할 지 모른다. 우리는 연약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캠퍼스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멀어지게 만들려고 혈안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수련회에서 하나님과 처음 언약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백서의 자부심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수련회에 와서 알게 되는 어린 지체들이 있다. 아무리 많이 수련회에 참석했다고 해도 언약이 갱신되는 자리에는 많은 자와 노인과 여자와 타국인까지 초청되었기 때문이다. 인정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현실주의이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지금쯤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는가?
 

수련회-일생의 섬김을 재확인하는 자리

이젠 수련회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이 있다. 정말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그래도 캠퍼스에서 선배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골로새서 1장 24절이하에서 바울은 자신의 일생을 살게하는 삶의 지표를 고백하고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의 수고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일생의 각오여야 하지 않겠는가? 일생을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겠노라고 말하는 제자로서 수련회를 우리의 유익을 위한 장이 아니어도 좋다. 내 후배가 이번 수련회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진다면 그것이 희생이고 고난이라도 내가 기뻐하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태도로 일생을 살겠노라는 자세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련회-냉소주의와 실용주의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수련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용적으로 가치가 있는 자리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는 자리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냉소적 자세를 버리도록 하자. 그러나 그런 실용적 가치가 설혹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삶의 자세가 있다. 우리가 허비되더라도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 질 수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기뻐해야한다. 그것이 선배연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그런 점에서 수련회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버려야 한다.

이번 수련회에 하나님이 두신 뜻을 새롭게 보자. 우리 연약한 자들을 언약갱신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음성을 듣자. 그곳에서 공동체를 성결케하며 기쁨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쁨을 회복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즐거움을 누리자.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이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모습을 즐기자. 우리 공동체에 하나님이 거시는 기대와 요구를 듣고 그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자.

왜 수련회가 있는가? 왜 수련회를 기대하는가? 왜 수련회를 참석해야 하는가? 어떻게 수련회를 지내며 어떻게 수련회 이후를 지낼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 여러분에게 맡긴다.

글 :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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