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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8

 

 

 

 

 

 

■커버스토리 

내가 말하는 나는 누구며 다른 사람이 말하는 나는 누군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비록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기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자신만 바로 안다면 천재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탁할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의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자기의 세계에 충실해야 한다. 충실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늘 문제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일은 자기가 마음 속에 의지하고 있는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이다. 나비는 나비의 세계가 있고, 까마귀는 까마귀의 세계가 있듯이 사람도 각각 자기가 믿는 바에서 정신의 기둥이 된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마음과는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거든 빨리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나는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다踐 것이요, 내가 보고 듣고 먹고 마신다는 것은 모든 동물들과도 다름이 없다. 그래도 내가 내노라 하는 것은 뚜렷이 구별되는 나의 나됨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나됨은 오직 나에게 속한 것도 아니요 천사나 하나님이나 그밖에 어떤 다른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와 하나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나의 껍질을 한 겹씩 벗겨보려고 시도할 경우,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서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의 존재는 내가 나로 인해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참여하고 있는 경우 뿐이다. 한 객체가 나에게 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로 인해서 세워질 필요가 있다. 결국 내가 그 객체를 그 전면성에 있어서 세웠을 경우만이 바로 전적인 나의 행위인 것이다.

 

네가 누구냐?

당신은 멀리까지 들리는 신문의 나팔을 부는 저널리스트인가? 당신은 시인인가? 작가인가? 설교단에 선 설교자인가? 정치적 연단에 선 연사인가? 당신은 세례 요한이 그런 질문을 받았듯이 "당신은 선지자로서의 직분 전반에 당신이 그 직분을 자각하고 극기하는데 입각해서 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기꺼이 받을 용의가 있는가? 당신은 당신에게 있어서 위험의 원인들이 무엇이며 약점들이 무엇인지 아는가? 당신은 선지자 발람같이 돈으로 매수된 사람인가? 아니면 마술사 앞에서 시몬 베드로와 같이 청렴한 사람인가? 당신은 요나와 같이 소심한가? 아니면 나단과 같이 담대한가? 당신은 사울과 같이 선지자들 가운데 있게 되었을 때에도 과거의 악한 자아를 고집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울이 바울되었을 때처럼 하나님을 위해 개인적으로 성별되었는가?

오늘날의 들려오는 소리들은 뻔뻔스러운 대중웅변가들의 자기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들일 뿐이다. 나는 이에 분노를 느낀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자기 탐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자유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일이 빈번하며 그들은 인간의 영원한 권리를 말하면서 실상은 자기 자신의 하잘 것 없는 이익만을 추구한다.

광적인 군중으로 둘러싸여 있든지, 조용한 고독 가운데 있든, 사람들이 당신의 면류관을 가시로 엮든 월계수로 엮든, 한 편이 당신에게 아부하려고 하든, 다른 편이 당신을 조롱하려고 하든 관계없이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는가? 당신은 사람들의 판단을 가볍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기만 당할 가능성을 생각하여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라고 선언한 바울과 같이 당신 자신을 건전하게 불신하는가? 당신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용서와 구원으로 충만한)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부정하지 않는가? 당신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니 위로부터의 속죄의 부르심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고백하고 부정하지 않는가?

흔히 단순한 겸양과 그리스도인의 겸손 사이에 간과되는 차이는 이것이다. 즉 겸양은 개인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깨달아 안 것인 반면 겸손은 죄 많음과 비참함의 기분을 안 것이요, 겸양은 사람들 앞에 중뿔나게 나서서 괜히 으시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겸손은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자기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이것이 설교자의 씨뿌림을 좀먹는 곰팡이요, 저술가의 펜을 해치는 독이요, 시인의 하아프를 녹슬게 하는 습기다. 어떤 고결한 가수는 이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의 노래가 허영의 보답을 구하여 세상의 찬양을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나의 하아프를 내던져 산산조각을 내고 당신 앞에서 두려워 떨며 영원히 잠잠해야 하오리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선지자는 자기의 자아의 밤을 끊임없이 짧게 하고 위대한 태양의 날을 끊임없이 길게 할 때만 참된 활동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그리스도, 동역자들 자기의 백성간의 참된 관계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요한은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자기자신을 위하여 발견한 대답은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만약 나의 지금 이 생활이 이성이 계시하는 참다운 길에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 것. 둘째 타인에 대한 자기의 정의, 우정, 특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유죄함을 인정할 것. 세째 자기의 전존재를 움직임으로써 의심할 수 없는 영원불멸한 인간의 계율을 실행할 것. 이러한 노동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자기와 타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계와 싸울 것이다(이말은 L.N.Tolstoi의 말을 인용한것임).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하는 무서운 칼날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가지 나 자신 중의 어느 것을 좇느냐에 삶이 달려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만이 참 나를 발견할 수가 있다. 자신이 보고 알고 있는 나. 어쩌면 너무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다보니 진실한 참 나는 어쩌면 영영 못찾고 살다 세상을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96년의 장이 저물어가는 오늘, 골방에라도 들어가 참 나를 찾아 보시기 바란다. 잃을뻔 했던 나. 존재가치도 없는 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나를 발견고 나의 참 존재가 얼마나 귀한가를 다시 한번 새기며 하나님께 감사하자.

글 : 이원재
광주 무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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