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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8

 

 

 



 

 

■커버진단II

자 우리가 하늘까지 닿는 영성훈련을 해보자!

선한 의도였던 '영성훈련'에 교묘히 파고 들어 그것을 '바벨탑 쌓기'로 변질시킨 인본주의에 대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다. 인간의 본성으로서 종교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종교자연숭배 사상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스스로 무신론자라 하는 사람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즉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성을 절실히 느낄 때는 초자연적 존재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영성훈련을 살피기 전에 인간의 종교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하는 내용의 요를 맛보이기 위함이다. 인간이 가진 절대자에 대한 의존적 본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선(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온갖 너저분한 '신령한 존재'들을 섬기는데 그토록 열심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왜곡되었음을 볼 때 오늘 우리 교회에서, 갖가지 많은 모임들에서 왜곡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믿음 없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주제넘게도 우리가 영성훈련을 '기(氣)'와 비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기 수련자들은 자신이 하나의 우주로서 무한한 잠재력을가졌다는 것, 때문에 그러한 잠재력을 스스로 개발하여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어떠한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신과학(新科學)'은 더 나아가 소위 과학적 입증을 통해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추켜세우는 동시에 신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그렇다면 영성훈련을 하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영성훈련, 왜 하는가?

영성훈련의 목적이나 목표는 다양하지만 크게 두 가지 뚜렷한 항목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목회자나 지도자들의 경우 '교회성장', 성도 개인일 경우에는 '신앙성장'이다.
'성장'이라는 용어가 공통으로 사용됨을 볼 수 있는데, 이 단어에는 두 가지 상이(相異)한 의도가 들어있다. 첫째는, "성장이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심의 부재이다. 열심의 부재는 끊임없는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성장'이란 적어도 한국교회에서는 당위명제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럽게 영성훈련을 꼭 필요한 것으로 합리화시킨다. <TheVoice>는 본지 26호(1997년 8월호) 커버스토리에서 이를 '인본주의'라 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된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우리가 대충 대충 살 수 없다. 우리는 세속과는 달리 경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하며 세속의 문화와 가치를 부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죄를 멀리하고 천국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므로 영성훈련은 피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경건주의'라 한다.

 

"선한 것을 쟁취하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뭔가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인간적으로 보기에 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와 그분의 선한 뜻을 살피기보다 '우리가, 내가 그렇게(선하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를 말로는 철썩같이 믿지만, 그것은 수식어에 불과하다. '내가 열심히 믿고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라는 기본 문장을 빛나게 하는 수식어. 이 수식어를 기본문장에 적절히 넣어보기 바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불행한 일이 생기거나 조금만 힘든 일이 닥쳐오면 금새 넘어지고 만다. 자신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기대했던 결과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 사람은 신앙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좌절하게 된다.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의 사랑? 웃기고 있네!", "이거 정말 믿어, 말어?"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지적하자는 것인지 이제 조금씩 드러난다. 성도들이 '거듭남', '성령 충만', 삶 속에서의 '복을 얻음' 등을 자신의 열심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야말로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묵상과 봉사에 힘쓰는 것이 어떤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TheVoice>가 꾸준히 제기해온 문제이며 앞으로도 다양한 각도에서 다룰 문제이므로 여기서 맺는다.

 

알미니안 주의, 인간은 존엄한 존재인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라는 주장이 인간의 의지와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보는 것이 알미니안 주의, 즉 인본주의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죄 가운데 있게 되었다는(인간 개개인이 지은 죄와는 별도로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존귀함과 잠재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주권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그럼 왜 아담이 죄를 짓게 내버려두셨나? 죄나 사탄은 뭐 하러 만드셨나?'라든지 '믿지 않는 자들이 누리는 부귀와 권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왜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가난과 병과 죽음을 주시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신앙인들이 흔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를 인정하기보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신비를 인간의 의지와 이성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극히 인간적 감정에 호소하는 이런 식의 질문에 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 이제 '기(氣)'와 영성훈련을 비교할 준비가 되었다. 알미니안 주의 역시 처음부터 이단사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 바른 신앙고백으로 무장했던 청교도들이 자존심을 내걸고 세운 하버드 대학마저도 얼마 못 가 알미니안 주의를 수용하게 된 것은 그것이 얼마나 교묘하게 인간을 혼동시키고 교만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氣)가, 신과학이 가지고 있는 기본 이념이 바로 이것이다. "여태껏 신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위축되었는가.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내 몸의 기를 최대한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나는 건강이든, 행복이든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신처럼 될 수도 있다." 이 말을 앞서 지적했던 영성훈련의 목적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동공이곡(同工異曲:표면은 다른데 내용은 똑같다.)이다.


경건주의적 영성운동의 필연적 악순환

영성훈련이 경건주의라는 또 하나의 위험요소를 갖는 것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영성훈련을 '세속과의 단절'과 동일시하고, '영적', '영성'이라는 개념을 방언, 귀신 쫓기, 신유, 환상, 입신, 금식, 예언 등과 긴밀히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예배·성경공부·전도·기도·예배당·기도원·신학·목회 등을 영적인 영역으로, 정치·사회·직업·돈·영화·고시준비·학문·예술 등을 세속적인 영역으로 양분하여, 전자를 추구하는 것이 곧 영성훈련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축소한다는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영성훈련을 하면 할수록 크리스천으로서 영적인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대해 아무런 영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눈앞에 벌어지는 각종 은사들에 '영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나도 그것을 얻겠다는 열망을 갖는 것, 하나님께 대한 열심에서 비롯되었을 이 열망이 어느새 욕심으로, 교만으로, 안 주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경건치 못한(?) 사고로까지 발전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교만에 젖은 경건주의는 알미니즘과 맞물려 악순환을 거듭한다.

'신령한' 것에 대한 열망을 '영성 추구'로 오해하는 것은 기(氣)와 흡사하다. 상당한 과학적 체계를 확립했다고는 하지만 신과 자연 앞에서 무력하고 작은 존재에 불과했던 인간이, 내 안의 잠재력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신처럼 되겠다는 소망은 싱겁게도 기 수련자가 보여주는 몇 가지 초능력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이론에서 비롯한다. 진정으로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 내 안에 감추어진 신의 오묘한 섭리는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영성훈련을 절대시하는 크리스천들이나 기(氣) 수련자들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싱거운 결말, 대안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 "영성훈련을 하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내내 영성훈련에 대해 난도질을 했으면서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다면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실 인간은 땅의 흙으로부터 지어졌지만 위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받았다. 그는 육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영적 존재이고 합리적·도덕적 존재이다. 그는 그 본질이 영인 혼을 지니고 있다. 그가 피조물 모두에게 적당한 이름을 주었으나, 인간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줄 만한 존재는 피조 세계에는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고귀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지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벗어난다면 인간의 존귀함은 곧 추한 죄로 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싶다. 어떤 이유에서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축소하고 그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이유로 감히 영성훈련을, 그것도 기(氣)와 같은 선상에 놓고 지적할 수 있었음을 이해하시길.

강정룡 기자(feel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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