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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7

 

 

 



 

 

■ 커버스토리

사탄은 마침내 입시를 선택했다


'저는 어른이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건 5학년인 내가 방학동안 공부랑 학원만 다니느라 별거별거 다 신경쓰고 놀러도 안가서예요.", "어른들 미워! 맨날 공부만 하라 하구, 소리만 지르구… 선생님도 미워! 피아노 쳐라, 공부해라, 예습 안하냐, 등등. 어른들은 매일, 6년 고생해서 몇 십년 편히 사는 게 낫다며 지금 열심히 공부하란다. 정부에서 일하는 어른들도 밉고 교육청에서 일하는 어른들도 밉다. 시험, 그게 뭐 좋은 거라구 아픈데도 공부를 하라는 건지. 휴―.", "저는 산수 경시부를 하는 아이입니다. 도대체 이거 숨막힐 듯이 공부만 시켜 죽을 것 같습니다. 불만입니다. 자율학습을 만듭시다." PC통신에 올라온 초등학생 아이들의 목소리다. '조그만 애들이 짜증부리는군.' 혹은 '그만한 때가 좋은 줄 알아야지.'하고 여겨버리기엔 그들의 상황이 안타깝다. 초등학생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일반 중·고등학생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정규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이다 과외다 해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10시 경. 월말이 되면 성적표가 두렵다. 성적과 시험이란 단어에 골머리를 앓는 학생들은 입시를 앞 둔 고3 수험생들만 아니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각각 3년. 그들이 말하는 공부와 시험이라는 소위 무거운 '짐'을 털어 내려면 12년은 족히 걸려야한다.

 

교육이 뭐길래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순수한 진리, 학문 탐구와는 이미 거리가 멀다. 대학이란 곳에 머리만 집어 넣기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중·고등학생에게 "왜 공부하느냐"고 물어보면 십중 팔구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정도다.

이런 지경이니 교육을 통한 인간성 회복이나 도덕성 구현 등의 열매들도 간과된지 오래다. 이러한 문제들로 교사들을 추궁한다면 그들도 할 말이 많다. 교사들은 하루 평균 2건 정도의 공문 처리를 맡아야 하고 여러가지 손이 가는 잡무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재 연구와 수업준비하기에도 벅찰 지경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담임교사 한명에게 맡겨진 아이들의 수이다. 한 반에 평균 50여명의 아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숫자적으로 따진다면 담임이 아닌 과목 교사들에게는 수백명의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엄청난 부담이 있다. 때문에 진정한 교육 개혁의 가장 시급한 관건으로 교사들은 하나같이 학급당 학생 수의 감소라고 이야기한다. 수십 혹은 수백 명의 아이들 하나하나와 진지한 대화 한 번 제대로 갖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겨우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은 성적 이야기, 진학할 학교 이야기가 고작이다. '도덕'을 가르친다는 도덕 과목도 하나의 지식을 주입하는 데 그치고 있는 현실에서 교사의 입지는 일반 학원 강사들과 다름없다.

우리나라의 교육풍토 때문에 고생을 겪는 이들은 학생, 교사 외에 학부모들이 있다. 학교에 정규적으로 부담하는 각종 수업비 외에도 과외비, 학원비가 그들의 가계 지출 부담을 가중시킨다. 특히 고액과외도 마다않는 요즘, 수입이 적은 가정에서는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논술 과외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어쩔 땐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분도 있어요. 금액요? 수천만원도 가능하겠죠." 논술 시험이 중시 되는 요즘, TV를 통해 논술을 지도하는 유명한 강사의 이야기가 충격적이다. 이른바 쪽집게 과외라는 기형적인 교육 형태가 성행하는 나라, 바로 한국이다. 고 3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은 새벽부터 부랴부랴 일어나야 한다. 밤 12시가 넘어도 그들의 자녀를 편하고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손수 자가용을 몰고 나가 하교길을 지킨다. '한국에선 고3이 왕이다.'는 말이 과언은 아니다. 그들의 곤두 서있는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집에서는 TV소리도 줄여주고, 아예 보지 않는 집도 있다. 고3 학생을 생각해서 휴일엔 놀러가는 것도 삼가한다. 각종 건강식, 보약으로 고3의 건강을 염려한다. 대학만 간다면 무엇이든지 해 줄수 있다는 식이다. 그 주체가 되는 학생들은 어떤가. 시험과 주입·암기식 공부, 대학진학에 대한 막중한 부담감에 짓눌려 있는 그들의 고생담은 궂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입시'라는 신흥종교

입시 D-day 100일이면 백일주를 마셔야 만 합격하고, 은반지를 끼어고 공부해야 든든하고, 자신의 출석번호와 D-day 날짜가 같은 날이면 으레 초컬릿 공세를 받는다. 요즘은 시험 잘 찍으라고 포크를, 문제 잘 풀라며 화장지를 선물하기도 한다. 학생들 사이의 이같은 행태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고, "다 미신이다"고 말하는 크리스천들까지도 마음 한 구석에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조심스레 들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은 비단 학생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시험 때가 가까와 오면 학생들 못지않게, 아니 학생들 보다 더 긴장하여지는 쪽은 부모들이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자기 자식이 일류대에 꼭 합격하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고, 합격을 보장한다는 부적은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구입한다. 문제는 이러한 학생들과 부모들 중 크리스천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신실하게 믿으시던 엄마께서 어느 날 부적을 하나 가져오셔서 제게 다른 사람이 안 보이는 곳에 품고 있으라는 거예요.", "제가 성적이 조금 떨어지자 부모님께서는 대학합격 이후에나 교회에 나가라고 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교회에 나가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아요. 공과 공부도 주입식, 어디서나 주입식이에요." 요즘 학생들의 입에서는 이런 불만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바로 기성세대에게 외치는 소리이며 교회교육에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이다. 입시가 새로운 우상으로 떠오르고 하나님 말씀 교육이 학교 교육보다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현실.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기 보다는 사육을 받고 있다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하지 않을까.

객관식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질문에는 자신있어 하지만 논리를 요하는 질문에는 '…인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학생들에게 학교 교육만을 주입시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의 자식들에게 똑같이 교회보다 학교를 우선시하는 부모들의 전철을 밟게 하는 것 뿐이다.

 

교회의 대학 증후군

지금 청소년문제와 교육문제에 관한 한, 교회는 그 기능을 상실한 듯하다. 과거, 이 땅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던 때를 돌아보자. 당시 교회의 앞서가는 프로그램들과 참신한 문화들은 이땅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교회의 문화가 세상의 문화들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연구와 발전이 없는 현재의 프로그램들은 이제 진부하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세상 문화에 맛들인 청소년들을 불러들이려면 어림도 없다. 어른 교재와 별반 차이없는 성경교재로 성경을 알아가는 청소년들. 우리에게는 가치관의 기초가 정립되어가는, 가장 예민하고 섬세한 그들에게 잘 흡수되는 언어가 사용되고 그들을 잘 이해시킬 수 있는 교재가 필요하다. 또 교회가 예산으로 준비해놓은 교육비는 턱없이 적다. 게다가 예배와 몇 분 안되는 성경공부 시간을 빼면, 별다르게 아이들과 호흡하고 그들의 고민을 나누는 교육 프로그램, 그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져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있는가. 그나마 '문학의 밤' 같은 문화행사도 어른들 눈치보기가 바쁘다. 청소년은 어른들에게 관심 밖의 존재인가.

대학수능시험이 얼마남지 않은 지금 교회의 고등부,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의 숫자가 턱없이 줄었다. 교회는 그들의 자율학습 시간에 맞추어 시간대를 아침 일찍으로 변경해주었다. 중고등부 학생들이 이끄는 코이노니아 등의 별도 교제시간은 줄이거나 삭제하는 것이 어른들의 마음에 안심이 된다. 고등부 임역원이 되면 으레히 듣는 소리는 "적당히 하고 집에 가서 공부해라"이다. 임역원들이 교회에 시간을 뺏기다 보면 대학에 많이 떨어진다는 것에 조바심이 난 교회 어른들의 다그침이다. 믿는 가정의 아이들이 임역원활동하기가 더 어렵다. 주위 어른들의 눈총이 여간하지가 않다. "대학 가서 봉사해도 충분하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개중에 고등학생을 자식으로 가진 이들은 직접 담당 목사님에게 자기 아이를 성가대 봉사 안시키게 해달라고 거듭 부탁하는 사례도 있다. 이미 수험생을 둔 부모들은 자식을 대학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런 기도치고 다른 아이들까지 정성스레 빌어줄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 아이만…"이다. 자기 자식의 대학 합격을 위해 기도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이 뭘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마냥 왠지 맹목적인 듯하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출세에 대한 인간의 탐심과도 연관된다. 그러한 탐욕은 자기 자신만을 사리게 하여 오직 내자식만 잘되면, 대학에 가기만 하면 된다는 어긋난 이기주의로 흘러가고 만다. 어김없이 시험 때만 되면 세상의 이기주의가 고스란히 교회에 침투함을 볼 수 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성전이 도대체 어쩌다가 '시험'과 '대학'이란 단어 앞엔 영 맥을 못추게 되어버렸는가.

 

하나님이 진리시다.

유태인의 천재교육은 너무도 유명하다. 아이들을 세상의 지도자로 세운 그들의 교육은 우리처럼 비싸지도, 특별히 고급스럽지도 않다. 단지 그들은 가정을 소중히 하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성경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시 78: 6∼7)"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고, 그 분을 위해 쓰임받을 삶이어야 함을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바로 이 점이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교회는 다녔어도 중고등학생이 되면 교회를 빙빙 돌거나 아예 떠나는 아이들이 많은 것을 교회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잠 6:6,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을 말씀과 더불어 자연에도 보여주셨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느끼고 그 분이 가르치시는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같이 좋은 교육의 장이 또 어디 있겠는가? 쌀이 곡류인지 몰라서 "쌀나무"라고 말한다는 한국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자연 그리고 말씀과 동떨어져 그 분의 형상을 발견치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슴깊이 알지 못하는 우리의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절망적이겠는가. 하나님이 곧 진리이시다. 그분을 알아가고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참 교육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현 교육은 1년에 수십명의 어린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몇 십만의 아이들이 신경통과 두통, 변비, 심지어 탈모증에 시달리는 교육현장을 똑바로 바라보고 우리들의 교육 풍토를 양토로 일구어 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바로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고 사고하며,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행동하는 자녀들로 자라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기독 신세대의 문화와 갈등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보완책 마련에 힘쓰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어야겠다. 교회에서조차 낡아빠진 교재로 성경말씀을 주입하지는 말자. 출석율에만 급급하지 말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여야 한다. 그러면 말씀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고 말씀을 더욱 사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교육의 개혁이 시급하다. 갈수록 변해가는 사회 교육과 학생들의 사고방식에는 상관없이 예전의 교육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교회 교육이 문제다. 또한 학생들을 위한 의식과 소양을 갖춘 전문 교사를 교육시키고 배출해야 한다. 그저 봉사 차원에서 믿음있다는 집사님들, 혹은 대학생들에게 교재 하나 주고 아이들을 가르치라는 교회의 무관심은 완전히 깨뜨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교육 예산을 충분히 지원해야할 것이다. 교회는 기독 신세대들에게 맞는 교육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전문교사들을 양성할 프로그램, 기관,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천 부모들의 잘못된 생각들도 고쳐져야 한다. 신앙적으로 존경하던 부모가 고3이 된 자녀에게, 신앙보다는 학교를 우선시하고 합격을 위해 성경적이지 못한 것을 강요할 때 그들이 받는 상처와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한 부모들의 행동은 '대학합격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는 잘못된 타협일 뿐이다.

중고등부 학생들이 줄어든다고 푸념하기 전에 입시로 인해 병들고 있는 그들이 하나님께로와 쉼을 얻을 수 있게 교사들과 교회의 담당자들, 그리고 부모들은 고민하여야 한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교사나 혹은 부모라는 지위와 권위로 아이들을 대하지 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이처럼 사랑과 봉사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교회교육, 학교교육, 가정교육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글 : 문지희·정설 기자(pulitze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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