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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인은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다시 말해서, '기독인이, 참다운 기독인이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기독교적 교육관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적 교육관'은 기독교적 역사관, 기독교적 인간관 등이 그렇듯이, 일종의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일종의 기독교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적 교육관'을 말하기에 앞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고, 또 그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의 바탕 위에서 교육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안목과 식견을 재검토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교육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독인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교육적 활동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누가 완전한 기독인인가"라는 문제와도 유사하다. 이 세상에 완전한 기독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완전한 기독인이기를 끊임없이 지향할 수 있을 뿐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완전한 기독교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완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찾아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추구해야할 대상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길잡이에 관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삶의 일부이지 전부일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을 인본주의적 종교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본주의적 종교관에 입각해서 보면, 종교 이외의 다른 영역들과 관련된 기독교의 가르침들, 예컨대 기독교적 역사관, 기독교적 과학관 등은 단순히 교회에서 '믿어야할 내용들'이지 각각의 문화 영역에서 '실천되고 준행되어야할 내용들'은 결코 아니다. 이처럼 기독교적 신앙과 다른 문화영역을 연관지으려는 노력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규정되며, 또한 기독교 자신이 이러한 인본주의적 틀에 맞추어 자신의 신학과 신앙의 수준을 재조정한 상태에서는, 종교 이외의 모든 문화 영역이 인본주의적 기운으로 뒤덮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 결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고 방식과 행동 원칙들이 교회의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들이 늘어나고 교회는 이제 종교적인 활동에서 조차도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보다 '믿는 일'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신본주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그 분의 모습을 회복시키기를 원한다. 기독교는 종교와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문화의 전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기독교를 한껏 펼쳐 나갈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회와 문화는 결국 살아있는 진정한 기독교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본주의적 종교관과 신본주의적 종교관에 함축되어 있는 신학들을 검토해 보겠다.
1) 인본주의적 종교관의 신학 2) 신본주의적 종교관의 신학 첫째, 신본주의는 '세속의 일'과 '신앙의 일'을 구분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신앙의 일로 본다. 이것은 우리의 전체 삶과 전인격과 모든 생각들을 남김없이 하나님께 복종시킬 것을 요구한다. 둘째, 신본주의는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도 그 소망을 둔다. 셋째, 이 세상의 문제들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예수님은 빈민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 호소하지 않으셨고 그의 양들을 교회에 부탁하셨다. 이 세상의 문제들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복종해야만 함을 사람들 앞에 증명해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바로 우리가 전념해야 할 일이다. 넷째, 회개하고 거듭난다는 것은 옛 옷을 벗어 던지고 아예 새롭고도 거룩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이 세상의 문제들을 새로운 안목 즉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보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그러면 이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천국에서까지 그렇게 필요하고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이 세상과 천국,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더라도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국의 삶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 두번째 까닭은, 우리는 천국의 손님이나 고객이 아닌, 백성이요 일꾼이요 상속자로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우리는 그 분이 하시던 일들을 우리의 능력에 따라 맡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직접 참여하게 될텐데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점이 없다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백성이요, 일꾼이요, 상속자'라는 말의 의미이다. 여섯째, 결국 이 세상에서의 부모됨, 자녀됨, 교사됨, 의사됨, 농부됨, 정치가됨, 사장됨, 학자됨, 예술가됨 등등은 우리가 알곡임을 나타내 보이는 시험대인 것이다. 그런제 '주(主) 안에서 부모됨'은 이 세상을 떠나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신본주의가 이 세상에 그 소망을 두는 까닭이다. '주(主) 안에서 의사되고 예술가 된다'는 것은, '종교는 기독교이고, 학교는 의과대학이나 예술대학을 나왔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의 신앙 만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요, 그의 의술과 심미안(審美眼)까지도 기독교적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신 것이었지, 천국이 임박한 시대에만 적용하는 과도기의 윤리가 아니었다. 그 분의 가르침은 천국의 윤리 자체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의 모든 삶의 방식과 사고 방식이 뒤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결단을 요청한다.
오늘날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현상적으로 볼 때 인본주의적 종교관에 입각하고 있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의 구조와 성격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 종교관 또는 신본주의적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그러한 기독교 세계관을 실지로 형성해 나가는 구체적 방안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기독교 세계관 형성의 두 기둥은 첫째, 성경을 통한 우리의 개혁과 거듭남, 그리고 둘째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하는 우리의 실험적 노력이다. 이 두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실하다면 우리는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할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머리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검증되고 구현되는 기독교 세계관만이 살아 움직이는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그 기독교 세계관이 검증되며 뿌리내릴 수 있는 삶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ec-clesia)이다.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의 실험실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실험됨으로써 끊임없이 검증되고 개혁되어나가며 성장하고 성숙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바로 교회 자신의 존재 양상이어야 한다.
교육 위기의 극복을 위한 처방은, 문제가 과연 무엇이며 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문제의 성격과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은, 이번에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교육 위기의 진단과 처방을 교육 전문가들게게 맡기고 우리는 단지 그들의 진단과 처방에 입각하여 실천하고 실행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기독인들은 교육 전문가들이 현재의 교육적 위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 주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인식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1.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교육의 위기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교육적 위기는 단순히 과정적이거나 기능적인 것이 아니요, 본질적이며 근원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공교육은 기독교가 만물의 근원이시며, 창조주시며, 통치자라고 믿고 있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과 자연만을 그 토대로 삼아 교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그러한 교육을 결코 온전한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독인들은 그러한 공교육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추종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누구 못지않게 옹호하며 이바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볼 때 교육적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인본주의와, 둘째, 교육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의 부재이다. 인본주의의 첫 번째 문제점은, 오늘날 공교육의 토대가 되고 있는 인본주의가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본주의 교육이 안고 있는 또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는 '지식의 생활화' 혹은 '지행합일'의 문제에 있다. 따라서 인본주의는 지식의 근거를 인간에다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되 인간이 그 지식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어떠한 윤리적·논리적 근거도 지니지 못한다. 세번째, 하나님을 배제한 인본주의는 인간 행동과 사고의 옳고 그름에 대한 어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인정하거나 주장할 수 없으므로 그 기준을 각 개인의 필요와 선택에 둘 수 밖에 없으며, 결국 '개인의 우상화'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넷째, 인본주의 아래서 교육은 결국 인간의 모든 삶을 통제하는 원리라기보다, '학교'라는 특정한 기관과 '학생'이라는 특정한 대상 그리고 '수업'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통제하는 원리로 변해간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육'을 인간의 모든 삶을 통제하는 원리와 활동이라고 보며, 삶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가 인간의 욕구 및 필요를 하나님의 욕구 및 필요에 복종시키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삶 그 자체가 본질상 교육적 과정이라고 본다. 온세상을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 즉 학교요, 진정한 교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교육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의 핵심이다. 그 다음, 교육적 위기의 둘째 원인인 기독교 대안의 부재에 관해서는 기독교의 이중적 교육 구조, 이원론적 세계관, 선교와 세속 교육의 밀월 관계를 그 요인으로 둘 수 있다. 첫째, 오늘날 기독교는 기독인을 양성할 때, 신앙과 종교의 영역에 대한 교육은 기독교가 담당하지만, 여타의 영역들에 대한 교육은 세속학교에 전적으로 위임을 하는 이중적 교육 구조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이 세상을 세속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기독교는 신앙에만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셋째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상황 속에서 선교해야 했던 선교사들은 서양교육과 서양의술을 기독교 전파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어쨌든 세속교육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선교의 좋은 수단으로만 여겨졌을 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비판과 대안의 제시는 시도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 학문은 기독교가 섬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세속 문화와 학문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을 표준으로 삼아야만 올바른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이 그러한 길을 가도록 밤낮으로 훈련시키고 있다.
기독교인의 경우에 '실험적 삶'이란, 이 세대 속에서 우리의 전체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찾아내고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실험실로 내놓는 삶을 말한다. 이러한 삶은 수많은 신앙적 도전과 모험과 실패를 수반한다. 사실 기독인의 삶만큼 흥미진진하고 모험에 가득찬 삶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인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심지어는 죽음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깊고 높고 선하시고 오묘하신 뜻을 찾아 행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출제하신 문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문제를 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과 믿음, 지성, 그리고 여러가지 재능들을 주신 까닭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잘 활용하라고 주신 것이지 잘 보관하고 있다가 그대로 반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 조심스럽고, 너무나 안이하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를 나무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패는 인간의 당연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주었는데도 신앙적 도전과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하나님은 많이 따지실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 세상 속에서의 믿음의 열매는 평안과 안식이 아니라 도전과 모험이다. 글 : 이창국(공주사범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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