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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4

 

 

 

 

 

 

  

■커버 진단

새들백과 윌로우크릭에 휩쓸리는 교회들

성장 지상주의에 무시당하는 '교회의 본질'


양적 성장에 눈이 멀어 무엇이 주님의 방법인지 외면하는 한국 교회는 이제 눈에 띄는 성공 케이스에 휩쓸려 따라가고 있다. IMF 시대를 맞아 이러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TheVoice>의 시각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 논리를 진단해보았다. <편집자주>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학생선교단체 대표 K 목사. IMF 경제 원조 시대에 더욱 어두운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새벽이 되려면 밤이 깊어져야 하듯이 지금의 경제 위기는 도전이요 성장의 기회"라 단언했다. 또 어떤 이는 한국 교회가 IMF 한파를 잘 이겨내면 미국과 함께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 전망하기도 했다.

 

성장논리 부추기는 IMF 한파

실제로 요즘 각 교회의 새벽기도에는 IMF 한파 이전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참석하고 있다. 금요 철야 예배도 마찬가지며 기도원도 더욱 붐비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는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경제 불황에 대한 걱정, 실직 불안감 등과 무관하지 않다. 안산 J교회의 경우 새벽 기도회가 더욱 활성화되고 전도도 훨씬 쉬워졌다고 말한다. 교회측에 따르면, 경제 불안 이후 새벽기도회 참석률은 20% 더 늘어났고 전도자 수도 이와 비슷한 비율로 증가해 1백 44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역설적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교계 언론의 보도다.

IMF 한파는 주춤했던 한국 교회의 성장에 한몫 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부어주신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이웃 사랑의 사명

경제 위기로 인해 현실적으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이 늘어났다. 그 동안 지나치게 교회 증축과 성장에만 몰두한다고 비난받았던 한국 교회에, IMF 체제는 하나의 구실이 되었다. 이들이 내세우는 대 전제는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감싸주어야 한다'는 것. 이와 맞물려 지상 명령이라는 '선교 사업'에도 최상의 시기 아닌가. 경제적 고통은 '종교'를 받아들일만한 최적의 심적 상태를 조성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새들백 교회'와 '윌로우크릭 교회'의 성공담은 한국 교회에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 그들이 내놓는 방법론은 인간의 정서에 부드럽게 호소하고 파고들어 강력한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일개 방법론이라고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 이를 도입한 몇몇 한국 교회들로 인해 이같은 방법론이 무뚝뚝한 한국인의 정서에도 크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

사실 이러한 방법론들이 기존의 한국 교회에 도입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구도자 예배의 시행, 예배 형식의 드라마틱한 변화 등등이 활발히 거론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방법론들을 도입하는 데는 어려움도 많았고 알게 모르게 눈치보이는 구석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심적으로 물적으로 궁핍하고 피폐한 시대가 도래했다. 따뜻하고 온화한 교회, 안정시켜주고 위로해주는 종교를 갈구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금, 방법론을 도입하는 교회들에게도 '할 말이 생겼다.'

윌로우크릭 교회에서는 일명 '열린 예배'라 부르는 구도자 예배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예배인가는 검증되지 않았다.
 

결과론적 성장논리

미래의 교인들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을까. '미래 교회'를 연구하는 이들이 예측한 결과에 따르면 첫째, '미래의 교인들은 다양성을 인정받기 원한다'. 둘째, '자신의 개성을 보존하고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침해받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셋째, '교회에 대한 요청도 다양하게 발달하여 교회에 대한 기대도 각양각색이 될 것이다'.

이는 미래 세대의 모습이라지만, 지금의 교인들에게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기에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새로운 세대를 전도하기 위해서 그들을 끌어들이는 교회도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제 쉽게 먹혀 들어가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마케팅(Marketing)' 개념.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이는 상업 용어로서, 소비자의 취향과 기호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판매 전략을 뜻한다. 따라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전문적인 계획이 요구된다. 이 개념이 교회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교회 마케팅'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지 오래다.

물론 교회 마케팅은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근본적인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교회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미래 사회 속에서만큼은 우리가 전도할 때 과거처럼 코웃음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케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비자들에게 공감하게 하는 일등 공신이다.

그러므로 구닥다리 같은 태도로 교회 성장 전략 앞에 머뭇거리는 태도는 이제 접어두어야 한단다.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승리하기 위해 새로운 사고로 재무장하라고 권고(?)당하기 일쑤다. 교회 마케팅은 '복음'이라는 내용물을 새로운 그릇에 담아낸다. 보기 좋고 신선한, 거기다 내용까지 갖춘 전도 전략으로 여겨지길 원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논리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예배의 형식도 달라지고 좀더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접근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따뜻한 차와 안락한 분위기 속에서 새신자를 맞이하고, 상담 등 각종 심리 치료도 제공해주는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좀더 철저하게 조직화되어야 한다. 마케팅은 소비 지향적 문화 속에 사는 인간들의 구미에 맞추어, 실용적이고 확실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방법론의 저변에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 빠진들 어떠한가. 지상 명령인 전도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고 주님의 교회에 성도의 수가 늘어나는 결과가 보장되는데, 성경적이지 않은가. 복음의 생산성 증대가 장차 눈앞에 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매달리는, 성장 논리의 실체다.

 

'심상히 치유하는' 성직자들

유다를 괴롭히던 앗수르가 쇠약해지고 새 강국 바벨론이 발흥하여 유다와 애굽을 점령하려는 대 격변기. 당시 제사장과 선지자로 대표되는 평화의 성직자들은 백성의 상처를 고쳐주는 일을 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예레미아 14장에서 '백성의 상처'란 기근이나 칼과 같은 광범위한 원인으로 말미암은 재난을 말한다. 재난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어서 본문이 '심상히'라는 말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예사롭게, 쉽게 치유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잠정적으로 위로하고 그를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오늘의 현상. 이러한 위로와 평강을 주는 행위가 영혼의 깊은 곳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노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지도자 핸드북'. 커다란 수적 성장만을 기대하는 한국의 일부 목회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교재가 되고있다.가증한 위로, 가증한 사랑

그러나 주님은 이같은 평화와 사랑의 운동을 뭐라 평하셨을까. '가증하다'하셨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렘 6:15 중)"

상처받은 백성에게 평화를 선포하고 평강하다 위로할 때에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얼굴 붉히지 않았다. 오히려 자긍하는 자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평화의 사자요 사랑의 사도로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냉혹하기만 하다. 그러한 모든 행위와 운동을 '가증'하다 여기시니…. 왜일까? 왜 하나님은 그들의 번제를 싫어하고 그들의 희생을 가증히 여기셨을까. 당시 유대인에게는 성직자들의 치유의 역사와 위로의 사역들이 전혀 '거짓'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거짓'으로 드러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 지키기도 힘든데

진리는 결코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때문에 믿지 않는 자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그를 교회까지 인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너는 더럽고 추한 존재", "벌레만도 못한 존재", "뭘 해도 잘 한 것이 없고 뭘 해도 악한 점 투성이인 존재"임을 뼈 속 깊이 들려주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할 터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알아야 드디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을 텐데 오늘날 궁극적으로 교회 성장을 겨냥한 이들로 말미암아 이러한 단계는 살짝 넘어가도 무방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인간 존재에 대한 추악함의 사실은 모조리 덮어놓은 채, 그로 하여금 진리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은 채, 그가 처한 현상만 아무리 위로한들 무슨 참 유익이 되겠는가.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못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렘14:13)"

참 평강, 진정한 평강은 다른 데에 있는데, 그것은 덮어두고 거짓 평강을 말하는 그들의 심중을 주께서는 꿰뚫어 보신 것이다. '가증하다'고 노여워하신 것이다.

 

새들백 교회와 윌로우크릭 교회를 분석하여 이를 중심으로 21세기 바람직한 한국 교회상(像)을 제시하는 서적들이 생겨나고 있다.그래도 성장하지 않느냐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해도 언제나 되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그것은 한결같다.

"그래도 성장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 성장을 바라보는 한국 교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방법이 어떻게 되었든 결과적으로 사람은 늘어간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늘어간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방법론들을 '들어 쓰신다'는 증거 아닌가? 즉, 아무리 잘못된 방법일지라도 비판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을 통해 교회는 확장되어간다는 주장이다. 이것처럼 주님의 도구로 확실한 것이 어디 또 있느냐며 자신들의 성장 논리를 정당화는 것이 바로 현대 교회들의 사정이다.

그같은 논리만 내놓고 추진시키는 동안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도와 우리에게 진정 소망이 되는 진리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다 보면 교회를 세상 가치관에 열어 두어야함이 불가피하다. 한 예로, 스스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응답자 중 53퍼센트가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했다는 미국 여론 조사 결과가 있다. 금송아지보다 못한, 껍데기만 남은 형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까 두렵다. 위와 같은 미국의 현실이 성장논리만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말로가 될까 두렵다.

 

특별하신 주의 역사

하나님의 거룩하고 큰 일은 그 백성으로 하여금 그 말씀을 듣도록 하시는 일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있다. 다른데 평강이 있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방법을 쓰고 계신다. 세상이 주는 방법으로 쓰지 않고 그 분으로부터 나오는 방법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알아보고 행하기를 원하신다. 감동하여 아는 것만이 아니라, 알고 행하는 것 까지가 진정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열매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것의 과정까지도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즉, 주님의 일은 주님이 친히 시작하시고 마지막 열매까지 거두심을 우리 인간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여기에 인간이 설 어떤 자리도 없다는 것이다.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14:7)"


정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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