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21 Logo

 

 

 

 

 

 

 

  

■ 커버 특별 인터뷰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최창섭 교수 인터뷰
 

<TheVoice> 취재팀은 한국 교계 언론의 현주소를 진단하기 위해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최창섭 교수를 만나 보았다. 최 교수는 우리 나라 언론학계에서 유일하게 교회 커뮤니케이션(Church Communication) 분야를 연구하고, 이와 관련하여 대학원에서 자아 커뮤니케이션 등의 강의를 맡고 있다. 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의 기독교 신문은 어떠한지 알아본다. ― 편집자 주


기독 신문들이 바람직한 언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고민 속에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바람직한 교회 언론의 위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어떤 신문이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을 통해 그 신문이 무슨 역할을 해야 되는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신문의 목적을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이 '나눔'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듯이, 신문은 인쇄 매체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 필자와 독자 사이에서 나눔의 정신을 일궈주는 매개체입니다.


그러면 교회 언론은 누구와 누구를 연결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겠군요?

읽는 대상을 믿는 사람에게 제한할 것이냐, 아니면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냐 하는 질문이 먼저 되어야 하겠지요. 비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릴 것인지, 아니면 믿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이와 의미를 되새겨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합니다.


상당수의 교계 신문들은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교계 신문을 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미국 대학의 경우, 학교 내에서 두 종류의 신문이 나옵니다. 학교측에서 만드는 신문은 기관지이겠고, 학생들이 만드는 것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되는 것입니다. 교계 신문의 경우에도 교단 소식을 전달하기 위한 기관지와 순수하게 언론을 목적으로 하는 신문, 그리고 양쪽을 혼합한 신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 대부분의 기독교 신문들은 이처럼 자기의 목적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언론을 자처하는 기독교 신문들이 바람직한 언론으로서 미흡하거나 부적절한 요소는 없는지요?

일반적인 문제점으로 첫째, 세속 신문에 비해 규모나 재정적인 면에서 열악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자연히 그 신문의 전문성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전문성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라도 인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둘째, 대부분의 교회 언론은 비신앙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극동 방송의 예를 든다면, 이 방송국의 음악은 대부분이 찬송가입니다. 이것은 청취자를 믿는 사람에 한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상을 믿는 사람에게만 제한하는 경우,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역할은 사라지게 됩니다.

셋째, 내용 면에서 보면, 성경 말씀의 메시지가 기사를 쓰는 기자에게 먼저 용해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표면적인 외침은 독자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것입니다.

끝으로 교계 신문이 존재 이유를 잘못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신문이 세속 신문을 비판하는, 다시 말해서 환경 감시의 기능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회와 문화에 어디까지 관심을 둘 것인지와도 연결되는 문제이겠지요.


이같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바람직한 기독교 신문이란 목적에 맞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해서 교계 소식을 전달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는 것입니다. 또, 신문 자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항상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신문이 독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신문은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듣지도 않고 내보내는 것은 독재고 횡포지요. 그래서 신문사에는 반드시 왕복선(往復線)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현재의 교회 신문은 너무나도 단선적입니다.
이것이 선행되면, 그 다음에는 신문사 내부 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우선 자격 요건에 맞는 사람을 골라야 할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들의 목표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개선이 필요하겠지요?

신문사 스스로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일단 독자를 끌어들이라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특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모방성을 탈피해야 합니다. 현재의 교계 신문은 아는 것을  행함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있으며 변화와 갈등을 싫어합니다. 현실적인 문제 운운하지 말고 도전을 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못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대학 교수들이 10년 전 강의나 지금의 강의나 같은 이유가 이를 제대로 비판하는 언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문이 교계에서 이런 일들을 해줘야 하고, 또 이를 위해서는 인적 자원과 자본 투자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기독교 신문과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씀해 주십시오?

글은 대중에게 파고들어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대변해야 합니다. 즉, 호흡을 맞추는 신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신문은 '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잔디를 밟는 사람에게 "밟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아저씨, 아파요!"라고 말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소식을 전달할 때도 자아 커뮤니케이션에 먼저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성복을 입히려고 하지 말고 맞춤복을 입히자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희생과 봉사, 사랑의 말씀 등이 그 사람의 생활 속에 파고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최고의 관건은 그것을 누가 하느냐 인데, 이럴 때 교회 매체는 교회가 가고자 하는 가치관을 심어주면서 이를 선행해 나가줘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교회 소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비판의 목소리도 내면서 말이죠.


끝으로, 교회가 기독교 신문들에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제 미디어 교육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 속에서 일반인들이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고, 미디어의 횡포에 의해 폭력과 섹스로 물들어가면서 거기에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가치관 등의 비뚤어진 가치관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세속 매체의 초점은 권력과 명예와 부이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를 일깨우는 것이 미디어 교육입니다.

식별력을 가지고 올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교육, 이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관심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가고자하는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과 나눔, 봉사, 섬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일반 매체는 '큰 것이 힘'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요. 이렇게 다른 가치관 속에서 식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회 매체이죠.
교회 언론 매체가 가야할 길은,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알리고 간접적으로 사람을 끌어 들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비판이란 이런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말보다 먼저 실천하라, 생활 속에 있는 일들을 꼬집어라, 되새길 수 있게끔 거울 역할을 하라, 사물을 비추려면 거울이 깨끗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 기자의 생활 속에 용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조진희 수습기자
독자편지

  관련기사

 

화두! 교계 신문에 대하여

 

외면 받는 교계 신문

 

사회를 향한 기독 언론의 힘을 길러야

 

기독교인은 "지고 이기는 싸움"을 해야

 

'저널'의 역할 감당하는 기독 언론

 

"정신문화 계도하는 저널이 필요하다."

 

 


Copyright(c) 1997, Voice21.net. But All right not reserved.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God's people. Amen (REVELATION 22:21)